#50 그릇의 텅 빈 공간이 없다면
<도덕경>을 보면 그릇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레 바큇살과 방에 빗대어 없음을 설명하는 바로 이 구절이지요.
‘서른 개 바큇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無 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 노자, <도덕경> 제11장. 오강남 풀이 -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수레 바큇살이지만 사실 그 텅 빈 공간이 없다면 수레바퀴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릇이 그 텅 빈 공간이 없다면 그릇이 될 수 없듯이, 그 텅 빈 배경이 있어야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요.
하늘을 봅니다. 구름 한 점 멋지게 걸려 있습니다. 구름은 작은 조각인데 시선은 온통 구름에만 놓입니다. 바탕이 되는 하늘은 저리도 넓게 눈 앞에 펼쳐지는데, 작은 구름 한 점에 눈이 먼저 갑니다.
눈은 애당초 바탕보다는 점에 집중하도록 발달한 신체 기관인가 봅니다. 수풀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임이 포착되었을 때 그 한 점에 집중해야 사냥도 하고, 맹수로부터 도망도 하여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귀도 큰 차이 없을 것 같군요. 세상 바탕은 고요이고 소리는 한 조각일 텐데, 고요에 머무르지 않고 소리 조각에 귀를 쫑긋 세우지요. 다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거친 수풀 속 살던 인류는 이제 따뜻하고 안전한 아파트 등에 살고 있지요. 맹수는 동물원에 돈을 내고 구경하러 가야 볼 수 있는 세상인데도 눈은 한 점에 집중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할까요. 온종일 뭔가를 집중해서 봅니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TV 화면을 들여다보며 살다가, 개인용 컴퓨터가 나온 후 더 작은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지요. 2007년에 아이폰이 나온 후 아주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시선 두고 살지요.
그렇게 작은 점들을 오래 집중하다 보니 눈도 뻑뻑하고 어깨는 무거워지지요. 바탕에 있는 고요한 세상에 머무르면 평온을 느낄 텐데 말입니다.
<도덕경>에는 고요가 뿌리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텅 빔이 뿌리입니다. 고요 속 텅 빔이 우리 생명의 뿌리이지요. 이제 시끄럽게 자판을 두들기던 손 멈추고 그 고요 속 텅 빈 공간에 들어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