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내기철...들밥 내어가는 길에서 인생을 보다

길은 모두에게 같은 거리로 다가오지 않는다

by 이상훈

내가 어렸을 적 이맘때면 들판은 모내기가 한창 벌어지곤 했다. 논마다 가득 찬 물이 바람에 출렁이고 가장자리엔 짙은 노란색 송악 가루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넓이가 채 50센티도 되지 않은 논둑길은 모내기가 시작되면 어른들의 모내기용 물 장화나 거머리 방지용 스타킹에서 흘러나온 물로 질척였다.
물못자리나 비닐못자리에서 자란 모를 모내기할 논에 옮기기 위해서 작업도구나 운반기구들이 이동된 논둑이나 농경로는 여기저기 파이고 무너진 자리가 곳곳에서 생겨나 성한 곳이 오히려 많지 않았다.

다만 간혹 길옆에 질경이나 민들레의 긴 꽃대가 축축한 날개를 이슬 기운을 겨우 벗은 아침 찬 바람에 말리기 위해 나온 나비와 씨름하고 있는 풍경이 평화라면 평화였다.

모내기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며칠 전부터 맞춘 일꾼들이 새벽밥을 먹고 동네 한가운데에서 크게 벗어난 먼 곳에서부터 모를 심어왔다.

모내기가 어느 사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새참 때가 되면 밥과 국을 비롯하여 반찬과 술을 몇 광주리에 나누어 머리에 이고 들밥을 내어가는 데 당시엔 엄청 진정성이 느껴져 힘든 모습을 읽을 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준비하시던 아주머니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을까!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들밥을 내어가던 아주머니들이 걸었던 그 질척이던 길을 여섯일곱 살 나이의 어린아이가 술주전자를 들고 배달 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전 10시가 넘어서면 태양은 지표면에 자기의 뜨거운 기운을 받으라는 듯 아우성을 치기 때문이다. 간혹 어쩌다 오후 새참을 나갈 참이면 아침일찍부터 시작된 노동으로 몸이 기진해 상황은 더욱 심란한 지경이 된다.

그 먼길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나선 아이에게는 실제 거리도 멀지만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2킬로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던 길이었는데 지금 걸어도 족히 왕복 한시간이상은 걸릴 듯하다. 내려쬐는 태양 볕 아래 그 길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걷다 보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로 이로 인한 일사병도 있었지만 더 큰 병들이 많은 시기여서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었지 싶다.

아이에게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슨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런 마을 태어났으니 숙명처럼 걷게 되는 길이었다. 간혹 가다 어느 집 앞마당에 설치된 상수도 수도꼭지라도 발견하면 버캐가 허옇게 킨 입을 들이 밀고 쭉쭉 빨아대지만 단수가 잘되던 시기여서 물 마시기는 가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길은 아이에게 고통이었다. 들고 가던 술주전자를 버리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잔소리와 화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해 보면 주전자 안의 술은 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흘린 것이 반이요. 마셔 버린 것이 반이다. 예전에 막걸리는 왜 그리 달았는지 시원하기도 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지금도 웃음이 나게 한다.

길을 가다 보면 어느 때는 말끔하게 걷기가 좋은 곳도 있고 어느 곳은 신고 있는 신을 벗고 가야 할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은 곳도 있다. 간혹 논길에서 미끄러져 논에 빠지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직면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물이 들어찬 논에 신을 벗고 들어가 미끄러운 논길을 우회하는 방법도 사용한다.

낮 기온이 오르면 논길 한가운데에는 간혹 뱀이 나와 똬리를 틀고 있기도 했다. 뱀을 눈앞에 두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여섯일곱 살 아이가 뱀을 건널 수는 없는 일이고 또다시 먼 길을 돌아서 갈 수는 더더욱 힘든 일 이어서 뱀을 쫓을 만한 흙덩이를 찾는다. 하지만 이미 들판의 모든 논은 모내기를 위해 쟁기로 곱게 갈아진 상황이었다. 아이에게 이 난관은 성인이 된 내가 요즘 겪고 있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술 주전자를 옆에 놓아두고 논에 들어가 진흙을 한 움큼 움켜쥐고 뱀에게 던지는 일이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것이 어느 한 때라고 편할 때가 있었나 싶다. 지나가는 것은 잊히기 쉽고 자기 본성에 충실하여 유리한 것만 기억하는 것이 사람인지라 지나 간 모든 것이 아름답게 기억되기에 그렇지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만만한 때가 하나도 없었던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