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길 위에 서다

길 위에 홀로 선다는 건 가끔 두려움과의 대면이기도 했다.

by 이상훈


예전 내가 다녔던 읍내에 있는 중학교는 집에서부터 대략 8킬로미터쯤 거리에 있었다. 집에서부터 출발하여 6킬로미터 정도는 평지였고 나머지 길은 언덕을 두 번 정도는 올라야 하는 황토색 산길이다. 내리막길이야 바람소리를 내며 신나게 달려가지만 오르막은 젖 먹던 힘을 다해도 중간에 한 번은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한다. 그 길은 걸어서는 1시간 30분 남짓 걸렸고 자전거로도 40분 이상 소요되는 거리다.

버스도 다녔지만 매일매일의 통학비도 아까웠고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은 여름이면 땀냄새와 아이들의 가방에서 풍겨 나오는 도시락 반찬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 돼 적응하기도 쉽지 않아 비가 내리는 날 등 특별한 경우에만 이용했다. 물론 비 오는 날의 버스 안은 버스를 추가로 배차하지 않는 한 몰려든 승객과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땀 그리고 빗물 등으로 피난민이 목숨을 걸고 타고 가는 열차의 풍경과도 같았다.

차는 잠시도 편하게 주행하지 않았다. 정숙 주행을 할 환경도 되지 못했지만 설사 정숙 주행을 하더라도 끼가 많은 학생들은 환영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바퀴가 땅 속에 박혀 일정 부분이 툭 튀어나온 큼직한 돌멩이 위를 지나거나 새로 깔아 놓은 자갈을 튕겨 낼 때마다 버스 차체는 여지없이 엄청난 움직임을 드러냈다. 또 역하고 메스꺼운 엔진 연료 냄새는 코 점막을 통해 울렁거림을 온몸에 전달했다.

더구나 버스기사는 승객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울 요량으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 앞뒤로 버스를 흔들어대는 등 그동안 배워온 운전 실력을 차장에게 보라는 듯 유감없이 뽐내기도 했다. 그러면 넉넉히 대여섯 명이 더 탈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데 그 새로 생긴 공간으로 버스 차장은 검은색 교복의 아이들을 솜씨 좋게 태웠다.

버스 안 맨 뒷자리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성질깨나 있는 아이들이 차지하고 앉아 버스 차장과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마음에 드는 여학생에게 장난을 걸었다. 이런 거북살스러운 버스를 함께 타고 간다는 것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힘들기만 했다.

예전의 버스를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맨 앞쪽과 중간에 문이 있지 않았다. 버스기사가 오르내리도록 앞쪽 운전석 옆으로 조그마한 문이 있었고 가운데는 승객들이 오르내리는 정상적인 문이 그리고 맨 뒤에는 버스 기사가 올라타는 앞문보다 좀 크게 만들어진 비상구가 있었는데 높이가 꽤나 높아 여학생들은 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재 모양의 버스는 내가 살았던 시골의 경우 80년도에 도입됐다. 비닐을 뜯지 않은 1인용 의자가 양옆 길게 늘어서 있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던 것이 엊그제인 듯한데 세월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참 빠르게 지나갔다.

버스 회사는 막차를 운전하는 버스기사와 차장을 위해 마을의 종점 정류장 인근 점방이나 송방에 계약을 맺고 방을 임대해 버스 기사와 차장들이 숙식을 해결하도록 했다.

매 학기 초면 학교는 반을 새롭게 편성하고 학습 게시판을 꾸미도록 한다. 그러면 각 반 임원들이 수업 종료 후에 삼삼오오 남아서 스티로폼, 도화지, 매직펜 등을 이용해 학습 게시판을 꾸민다. 보통은 학습판 구성을 먼저 하고 컬러 도화지에 펜으로 그려 넣거나 그림을 오려 붙인다. 일은 보통 두 세 사람이면 충분하고 또한 두 세람만이 일을 한다. 나머지 두세 사람은 옆 교실을 왔다 갔다 하며 정보를 얻어 오거나 재미있는 방송 이야기나 동네 처녀총각 이야기로 시간을 메워준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는 나는 그저 열심히 그림을 그리거나 요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선생님들처럼 자르거나 오려 붙이는 일을 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인 그날도 방과 후에 학습 게시판 꾸미는 작업을 마치고 나니 오후 8시가 넘었다. 오후 여덟 시는 24시간으로 환산하면 20시이다. 24시간 중 맨 처음 20으로 환산되는 시작점이다. 3월의 20시는 몹시 깜깜했다. 더구나 하교하는 길엔 괜히 지날 때마다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는 서낭당 고갯길도 나오고 지금처럼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아 자전거는 자갈이 깔린 신작로를 털털 거리면서 달려야 했다.

그래도 함께 했던 아이들과 같이 학교를 출발할 때는 그런 두려움은 서로의 이야기와 웃음에 힘입어 마음 저편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잠시 뿐인 시간이다. 함께 했던 아이들이 서로의 집으로 흩어져 가고 나 홀로 가야 하는 5킬로미터 남짓 남은 때가 되면 길은 어둠에 한발 더 깊숙이 들여놓는다. 이때가 되면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듯 아니면 누가 부르는 듯 스멀스멀 사라졌던 공포감이 갑자기 몰려나온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사람의 마음을 잘도 읽어내 환영과 환청이 절정을 이룬다.

그날따라 달빛도 없던 칠흑 같은 밤이었다. 그나저나 잠시 후면 6.25 때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묻혔다고 전해지는 농수로가 나온다. 갑자기는 아니었겠지만 차가운 냉기가 옷 속을 조금이라도 파고 들 모양이면 온 몸의 솜털은 바짝 일어서고 피부조직은 전쟁터에 막 배치된 병사의 근육처럼 돌덩이 같이 굳어져 버린다. 이발기로 박박 밀어진 솜털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머리칼도 쭈뼛 일어서고 긴장감을 몰아내려는 듯 땀방울이 숨구멍 사이로 연신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집으로 가는 길엔 일정한 거리마다 특징적인 것들이 있다. 성원리 방앗간을 지나 얼마를 가면 쌍 주막이 나오고 그다음은 피원 방앗간이 그다음은 느티나무가 나오는 식이다.

쌍 주막은 길 양옆으로 주막이 마주 보고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합덕장을 본 장꾼들이 도고장 선장장 온양장을 가기 위해 들렀던 곳이고 반대로 외지에서 장사를 끝낸 장꾼들이 합덕장에 가기 위해 들렀던 곳이다. 쌍 주막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합덕장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혹은 집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이정표 노릇을 했다. 주막은 마루와 부엌, 방이 두 칸 정도 차려져 있다. 주막엔 장꾼들과 술꾼들의 질펀한 이야깃거리가 가득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스름한 저녁 어느 40대 남성이 합덕장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자전거로 돌아오는 길에 시비를 거는 웬 총각 놈을 만나 밤새 다퉜는데 새벽에 술을 깨고 보니 주막 지붕 위에서 자전거 핸들만 가지고 열심히 운전 중이었다는 도깨비 관련 스토리가 그중 많았다.




그날따라 길은 진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는 분명 없었던 진흙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비도 내리지 않았다. 돌멩이가 불쑥불쑥 튀어나온 마른 길을 가기에도 자전거는 벅차 했는데 자전거 바퀴에 감기는 진흙을 이겨내느라 두 다리는 몇 배의 힘을 더 쏟아부어야 했다. 저녁도 못 먹고 빵 한쪽으로 허기를 채웠는데 배고픈 줄을 전혀 모를 정도로 어둠과 진흙 길은 적지 않은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전방으로 몇 미터를 전진해 나아가면 나타나야 할 피원 방앗간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귀신에 홀렸나 보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오직 이 길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모님도 안 계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삶이 끝나는구나 싶었다.

페달 밟는 소리와 자전거 짐 받침대에 실려진 책가방의 터덜 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3월의 밤공기가 살짝 검은색 학생 모자의 창을 지나고 논 바닥에 흩어진 하얀 비닐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추웠지만 등엔 흥건히 땀이 배어 있다. 스마트폰도 없었고 전화기도 없었던 그 시절 집에 계신 부모님에게 따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자전거 페달만을 저어야 했다. 머릿속은 온통 도깨비와 한국전쟁 때 죽은 학생들의 원혼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쌍 주막과 피원 방앗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대략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되면 도달되어야 할 것이라고 몸이 알고 있다. 그러나 머리는 온통 다른 생각뿐인 듯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 거기 상무냐?”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구부정해진 허리와 관절염으로 성한 손가락 마디 하나 없는 젊은 날의 어머니가 거기서 부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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