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돼지아프리카열병으로 더듬어 본 어린 시절의 단상

어린 시절 단백질의 가장 큰 공급처는 돼지고기였다.

by 이상훈


시골의 여느 마을과 같이 예전 우리 시골집엔 돼지 한 마리가 가끔씩 키워졌다. 음식물쓰레기도 줄이고 밭에 거름도 줄 요량이었지만 제일 중요했던 이유는 아마도 짭짤했던 수입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키웠던 돼지의 종류도 흰색의 랜드레이스를 비롯해 검은색 바탕에 주둥이와 다리 쪽이 부분 색인 바크셔나 몸 전체가 온통 검은 색인 흑돼지, 호랑이털 무늬를 가진 돼지 등으로 다양했다.

그 당시에는 방앗간에서 쌀겨를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쌀겨는 벼를 도정할 때 쌀 눈 등이 박리 과정에서 떨어져 나와 영양성분이 훌륭한 사료였다. 지금도 쌀겨를 사료용으로 일부 사용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부가가치가 높은 화장품 원료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쌀겨는 미백효과뿐만 아니라 보습효과도 뛰어나다는 연구가 이어지면서 경제성이 있는 재료로 부각되고 있다.
이 쌀겨에 식사 후 나온 잔반과 구정물 그리고 버려진 채소 등속을 섞어 주거나 별도의 냄비나 솥을 이용해 쌀겨와 각종 콩깍지 잔해를 넣어 한 소 쿰(한소끔) 끓였다 적당히 식혀서 내어주면 돼지들이 퀘액 퀘액 소리 지르며 훌륭한 성찬이 되어주었다.


보통 2평 정도의 공간에 돼지 한 두 마리를 키웠는데 분뇨 배출이 원활치 않아 아무리 돼지를 깔끔하게 키운다고 하여도 우리 안은 늘 지저분함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보통 1주일에 한 번 이상 새 짚으로 청소를 해시는 듯했다. 돼지우리에서 나온 분뇨와 검불이 엉켜있는 두엄은 퇴비장으로 옮겨져 봄철에 밭고랑과 논 등에 뿌려졌다.

돼지 도축은 겨울에 주로 이루어졌다. 도축장에서 도축하는 것은 아니고 마을 공터에서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겨울에 도축을 해야 냄새도 덜하고 돼지를 잡아 고기를 실외에 보관해도 상하지 않고 장기간 먹을 수가 있었다. 돼지를 키우는 시점은 보통 추운 겨울은 관리가 어려운 관계로 따스한 봄철이 되어야 새끼 돼지를 시장에서 사다 키웠다.


새끼돼지는 젖을 뗀 지 대략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을 넘어서는데 이때부터 경제적으로 실익이 되는 도축 시점이다. 3월~4월 경 키우기 시작했으면 10월 정도부터 넉넉하게 고기를 먹을 수 있다.

돼지우리인 돈사는 여름철이면 파리 모기의 서식지였다. 각종 돼지 관련 질병이 유행하기도 해 성돈이 된 돼지가 죽어 나가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소 같은 동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모처럼 목돈을 마련하여 집안 대소사를 치러 보려고 했던 집안 가장은 침울한 분위기로 몇 날 며칠을 보내야 했다.


돼지분뇨 또한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초가을녁이면 돼지우리 지붕 위에는 분뇨통 주변에서 분뇨를 먹고 자란 박이나 호박이 큰 위용을 자랑했다.
냉장고도 흔하지 않았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돼지는 주로 겨울철에 많이 잡았다. 잡았다는 의미는 도축했다는 뜻이고 도축장도 위생관념도 모두 크게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돼지를 잡기 위해 맨 처음 하는 일은 커다란 솥에 물을 끓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돼지를 밖으로 끌어내 네 다리를 꽁꽁 묵고 메주 덩이만 한 추가 달린 대형 저울로 돼지 무게를 달아 비용을 산출한다. 그다음 커다랗고 무게감 있는 도끼 등으로 혼절을 시키는데 비명소리가 엄청나 고통을 짐작할만할 수 있겠다. 당시엔 집안 대소사 때마다 돼지 잡는 일이 다반사 여서 모두가 크게 괘념치 않았다. 그렇게 도축된 돼지는 목이 따이고 선지피를 대야 등에 받아 중요 식재료로 이용했다.


동네 도축 전문가 분들은 잡는 과정에서 오소리감투(돼지 위) , 돼지 코, 혀, 귀 등을 소주 등 술과 곁들여 즉석에서 불에 구워드 시기도 했다.
몰려든 아이들도 빙둘러서서 돼지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체험하는데 어른들은 해체 과정에 나온 방광에 바람을 넣어 아이들에게 주기도 했다. 별 다른 놀이가 없던 시절에 오줌보라고 불린 방광은 충분한 놀이가 되어 주었다. 도축 전문가들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주고 보통 내장 등 부산물을 가져가 국을 끓여 먹는데 아마도 3~4일간은 이 국으로 반찬 걱정을 덜 기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돼지곱창전골이라고 해야 하나 기본양념은 고춧가루, 간장, 소금, 파, 마늘, 새우젓, 가을에 담근 배추김치 정도였다.
정리된 돼지 내장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놓은 다음 땅속 깊이 묻어둔 김장독에서 숙성이 제대로 된 배추김치를 적당량의 물어 부어 펄펄 끓인다. 그다음 김칫국에 잘라 놓은 내장 등을 넣고 알맞게 익어갈 때쯤 해서 고춧가루 마늘 파 등을 넣어준다. 그다음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상에 올리면 된다.

70년대엔 삼겹살이 없었다. 요즘과 같이 삼겹살이 인기 있으려면 안성맞춤인 연료와 조리기구가 있어야 하는데 70년대에 요리를 만드는데 쓰였던 것은 연탄이나 등유를 이용한 석유곤로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기름기가 많은 부위를 직화로 조리하기에 적당치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돼지고기는 국으로 끓여 먹거나 머리고기 등과 같이 푹 고아서 반액 상태의 물질로 만든 다음 틀에 넣어 식혀 수육 형태로 밥상에 올리기도 했다. 색상이 투명하고 실고추 등이 고명으로 얹히면 고급스러움까지 묻어났다.

당시 정부는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창 경제성장으로 고기 수요가 많았던 일본에 등심이나 안심 부위를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잘 먹지 않는 족발이나 돼지머리 내장 기름기가 삼층 이상으로 겹겹이 쌓인 삼겹살은 수출되지 못하고 국내 수요로 이용토록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로 인해 70년대 후반 들어서는 대도시는 물론 지방 중소도시에도 순댓국 집이나 머리 고기 집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 족발과 내장 등을 주재료로 한 요리를 많이 만들어 팔았다.

우리 시골도 돼지고기는 대부분 국으로 끓여 먹었는데 이는 국의 양을 늘리는데도 큰 목적이 있었다. 한정된 돼지고기로 많은 가족을 감당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고 해서 내장과 선지 그리고 콩나물과 김치 등의 등속을 넣어 거의 한 솥이 넘치게 양을 늘려 며칠이고 먹도록 했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당시 아이들은 요즘 시선으로 보면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겠지만 국속에 고기를 건져내어 손에 들고 다니며 고깃국을 먹지 못하고 있는 집 아이들에게 자랑하며 먹기도 했다.

우리 동네엔 전방이라는 명칭의 가게가 한 두 곳 있었다. 전방에서는 가정에 필요로 했던 초나 성냥 고무줄과 비누 치약 등 생필품류를 많이 팔았고 모든 동네 소식을 나누고 접하는 장소였다. 게다가 리사무소와 방앗간이 있던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어서 농한기에 할 일이 없었던 어른들의 놀이공간이 되기에 매우 적합했다.

어른들은 아침을 먹고 나면 집을 나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대부분 놀이터인 전방에 모여 화투를 치는데 내기 화투의 대상은 주로 술내기이거나 담배내기가 보통이었다. 가끔은 타짜들끼리 모여 큰 판을 벌이기도 했다.
전방에서의 술내기 중 술은 막걸리나 소주(금복주 선양)였고 돼지고기와 두부 파 등속을 넣어 끓여내는 돼지고기 전골류와 돼지고기를 고추장으로 볶아낸 두루치기로 한 상이 차려졌다.


지금도 거하게 한 잔을 걸치고 늦은 밤 귀가하시는 아버지 모습이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