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비 story 4

나의 아버지. 내 아이의 아버지

by 이상훈


점심 먹을 즈음해서 하늘이 먹구름으로 덮이기 시작하더니
밤 깊어지자 비가 내렸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아이의 손톱과 발톱을 잘라주면서 어릴 적 이맘때 옥수숫잎을 흔들던 그 바람이 생각났다.

조석으로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하는 때가 되면 7-8월간 비워졌던 텃밭이 일구어진다. 비워졌다기보다는 호박이나 오이덩굴과 까마중이나 비듬 같은 잡초 등으로 가득했던 텃밭이다.

텃밭의 주위엔 어쩌다 덜 익은 옥수수가 남았는지 그러나 수술은 갈색으로 포자들은 이미 말라버렸지만 아버지는 수숫대와 함께 남겨두었다. 옥수수 뿌리는 땅 위 몇 센티미터 위 줄기에까지 잔뿌리가 생겨 든든히 줄기를 떠받친 모습이다. 대부분이 그런 모습이었다. 연두색이기도 하고 보라색과 주황색 그리고 일부는 약간 붉은색을 띠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잠시 세상을 움켜쥐려는 마음을 이해해서였는지 배추가 어느 정도의 포기를 가질 때까지 옥수숫대는 잘라지지 않고 가을 하늘을 나는 잠자리에게 휴식을 주었다.

아마 추석을 지날 때까지 혹은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남아 있기도 했다. 아버지의 게으름 정도에 따라서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옥수숫대의 간절함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른 아침 화장실을 가다 보면 문 앞 텃밭에서 밭 일구는 소리가 들린다. 이른 아침 동트기 전부터 아버지는 쇠스랑을 이용해 흙을 부수고 고랑을 만든다. 그리 긴 밭이랑은 아니었고 아침나절 두세 시간 정도면 일굴 수 있는 크기의 밭이었다. 두 개의 밭두둑을 일구고 한쪽엔 배추씨를 다른 한쪽엔 무씨를 뿌렸다.

보통 이 시기에는 태풍이 동반된 폭우 외에는 별다른 비 소식이 없기에 어린 나는 텃밭 한편에 널찍한 물을 퍼다 놓은 고무 다라를 놓고 고무 다라에서 물을 양철 조로(jorro) 통에 퍼 담은 다음 밭이랑을 따라 물을 주었다. 아버지를 돕는다는 것은 그 정도였다. 밭을 직접 일구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맨발로 혹은 장화를 신고 이랑을 따라 조로를 통해 물을 주는 것은 일이라기보다 조로 꼭지를 통해 나오는 물줄기의 시원함으로 소꿉장난인 듯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의 아버지와 지금 내가 아이의 손톱과 발톱을 잘라주는 일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그때의 아버지보다 지금의 내 나이가 훨씬 많은 것 같은데 밭이랑을 곱게 다듬던 아버지가 주는 느낌은 내가 지금 아이에게 전달해주는 그 느낌과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곱게 쇠스랑으로 두드려진 흙은 참 부드러웠다. 밭이랑을 일구며 검게 익은 까마중 몇 알을 건네주던 아버지!
햇볕에 검붉게 그을린 얼굴과 잘라내지 않은 수염 쌍꺼풀진 눈 주변의 자글자글한 주름...
비 내린 아침에 왜 그 생각이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