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무엇을 갖추어야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까?
엊그제 직장 후배의 어머님 상을 다녀왔다. 완쾌되었던 지병이 얼마 전에 재발하여 급속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던 듯하다. 후배도 어머니가 이렇게 빨리 생을 마감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다. 후배가 30대이니 어머니 나이는 60세 전후 일 것이다. 나와는 10년 안팎의 차이가 날 뿐이다.
요즘 은퇴하시는 분들이거나 은퇴를 앞둔 분들은 은퇴하고 무엇을 해야겠다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녀들의 학업이 계속되고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 규모의 지출이 순간순간 벌어지기도 해 부모 입장에서는 경제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만 하더라도 나의 선배들은 은퇴하면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고 살겠다. 해외여행도 자주 가고, 낚시 같은 취미생활을 맘껏 해보겠다고 많이 들떠 있기도 했다.
실제로 그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건축 리모델링』이란 책자를 만들었는데 대단히 작문을 요하는 것도 아니고 건축자재 정도를 소개해 놓은 것이었는데 제법 많은 이들이 찾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전원생활을 꿈꾸고 실제로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나는 선배들에게 “해외여행이나 취미가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에요.” “지금부터 열심히 다니고 익혀야 은퇴하고 자연스럽게 되는 겁니다.” 하고 훈계 아닌 훈계를 하곤 했다. 꿈이라도 꾸게 놔둘 것을 말이다.
요즘은 세대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즐기는 것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중장년층은 젊은 세대만큼 취미 등 삶의 질이 높은 편이 못된다. 또한 60대에 정년을 맞아도 예전만큼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편안한 노후를 보장받지 못한다. 이로 인해 은퇴를 해도 무엇을 하겠다. 라기보다 재취업 등 지속적인 경제활동에 더 관심을 많이 둔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 전혀 아니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다가와도 나를 뒤돌아 볼 시간도 갖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을 한다. 자식이 잘 되기 만을 바라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자식에게 조금은 보탬이 되었을지 몰라도 자식의 삶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부모세대의 이런 마음가짐은 우리 국민소득이 지금 만 못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을 마감하는 방식에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갑작스러운 죽음은 “인간의 존엄”과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가치 있는 죽음이나 후회 없는 죽음을 맞기 위해 무엇을 얼마만큼 해야 할까? 아이들을 먼저 보낸 부모들의 경우 무엇 무엇을 못 먹인 것이 제일 많이 후회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식주일까? 아마도 성인들은 그것은 아닐 듯싶다. “자식들 장가보내고”, “손주의 탄생을 보고”가 죽음에 대해 얼마만 큼이나 생각하고 말씀하신지는 몰라도 나이 든 어른들이 많이 말씀하시는 부분이다.
맛있는 것은 얼마만큼 먹어야 후회가 없을까? 여행은 얼마만큼 다녀야 원이 없을까? 좋은 집, 좋은 옷, 손주 세대의 성장을 보는 것 이런 것이 인생을 마감할 때 가장 중요한 것들일까?
우리 부모 세대들이 이런 관념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전쟁과 가난, 독재로부터의 억압 등에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로 인해 죽기 전에 이런 것에서 탈피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것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죽기 전의 소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관념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모세대와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유전 혹은 가정 내에서의 교육에 의해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외형적으로 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거부하고 싶다. 내면적으로는 가족이 아닌 내가 태어난 세상에 일부라도 기여를 하고 삶을 마감하고 싶다.
천상병 시인이 현세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했듯이 내일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두렵지 않았으면 한다. 얼마만큼 세상을 눈으로 입으로 몸으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없다. 세상 나이로 적당히 죽을 시기를 판가름하는 것은 고민이 필요한 듯하다. 죽을 나이는 어르신들이 연세의 긍정성을 부각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어쨌든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어느 때 죽더라도 나 스스로 안타깝지 않도록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으면 한다. 그런 후의 죽음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본다. 어쩌면 인생은 아는 만큼 힘이 더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도 당나라 유학길에서 삶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내가 가족에게 바랄 것은 없지만 나의 가족 여부를 떠나 모든 민족이 전쟁과 기아의 고통이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