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었을까.
20명쯤 되는 아이들이 공주행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아마 천안역 옆에 있는 시외버스정류장일 듯싶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천안을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떠나도 보는구나 이렇게 다른 지역도 구경하는구나 하며 멍한 감성에 젖어 있다가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차창 밖 풍경에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꼈다. 먼 곳도 아닌데 먼 곳에 여행을 온 그런 느낌 말이다. 시내와는 다른 모양으로 펼쳐지는 도로의 곡선들과 이정표 그리고 가로수, 내가 보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던 강이나 산맥의 높낮이와 흐름, 밭에 심어져 있는 이색적인 작물들 그리고 논밭의 모양새 등이 그랬다. 그것들은 냇가에서 앞으로 아이들과 시도할 천렵과는 다른 기운으로 색다름으로 혹은 다양성으로 나에게 들어와 나를 들뜬 감정으로 확장시켜 나갔다. 나에게 있어서 천안도 내가 자란 곳이 아닌 외지였고 그래서 솔직히 천안 인근인 성환이나 입장만 나가 보아도 대단한 두려움 같은 것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곳보다는 조금 먼 외지로 나간다니 즐겁기도 하고 생경한 풍경들에 호기심들이 얹혀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실업계 고등학교 특히 공업고등학교의 3학년 2학기 교실은 살풍경하다.
3학년 여름방학 무렵부터 많은 아이들이 실습을 나간다. 실습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상업적으로 활용해 보기도 하고 제조업계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양질의 인력을 채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친구들이 수업 대신 현장실습을 나간 자리는 띄엄띄엄 지금의 코로나로 위태위태한 교실 안 풍경과 흡사했다. 어차피 현장실습은 시간의 문제일 뿐 누구나 가야 할 일이었고 많은 아이들이 그것을 바랐다. 매일매일 다수의 선택된 아이들이 면접을 보러 이곳저곳의 회사문을 두드렸다. 학과 사무실에도 여름방학 시작되기도 전부터 국내의 내노라하는 대기업부터 이름 모를 중소기업 등의 취업 요청 공문이 들어와 있었다. 공업고등학교는 전공학과가 있고 과 마다에는 별도의 건물과 학과 사무실이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대학을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만큼 어느 회사를 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했다. 국책 회사에 실습생으로 가서 전공을 살리고 박사가 된 아이도 있으니 말이다. 또 어떤 직종이냐도 중요했고 급여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군 문제가 해결되는 곳도 많아 주어진 시간 안에 회사를 선택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선택할 것인가 기다려 볼 것인가가 최고의 숙제일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추가적인 공부를 요구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리였지 싶다. 또한 수업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정상에 가까웠다. 가르치는 선생님 역시 맥 빠진 수업을 간신히 이어갔다.
그런 날이 반복되다 보니 일부 대입학력고사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도시락을 먹으로 학교에 나오는 것이 일상이 되어 갔다. 또한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는 아이들도 누군가 특별한 지도를 해 주는 것이 아니었므로 자주 취준생들과 의기투합할 때도 적지 않다.
실제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공부란 것이 마음에 부담만 잔뜩 안겨 줄 뿐 실제 공부한 만큼의 성과는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았다.
지금은 신부동에 커다란 종합버스터미널을 갖고 있는 천안은 예전에는 천안역 왼쪽 편에 도내와 도 경계 외로 나가는 두 곳의 시외버스터미널과 그리고 천안역 광장 건너편으로 고속버스 터미널을 가지고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 바닥은 언제나 연탄재와 엔진오일이 범벅이었고, 그곳에서 버스표를 사고 버스를 기다릴 때면 엔진오일 냄새로 속이 메스꺼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졸업한 천안공고는 성황동이라는 동네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문화동이 있었다. 학교 북쪽과 동쪽으로는 신부동과 원성동이 위치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주로 자취를 했던 곳도 학교가 있던 성황동과 원성동, 신부동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당시에 나는 다가동이나 불당동, 백석동, 와룡동 등을 잘 알지 못했다. 그 지역들은 공장들과 평범한 주택들이 빼곡히 둘러싸여 있어서 가보아야 할 특별한 일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별 패권 지역이 있어서 가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천안역 서편은 천안상고가 있던 구역이고, 천안역 남서쪽엔 천안농고가 있던 구역이라 각 학교의 논다는 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천안역으로부터 북북 서쪽 그러니까 역이 자리한 대흥동 이북이었고 중심상권과도 인접한 위치에 있었다.
자취하는 아이들이 학교 중심으로 밀접해 살았으니까 영역다툼이라면 영역다툼도 일어났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특히 역이 있던 주변은 당시 핵심 상권이어서 주변에 분식집, 만화방, 커피숍 등이 많았고 이들 사이로 아이들이 스며드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제안이 등장했다.
추억 쌓기라고나 해야 할까.
아이들에게 무의미한 것보다 어쩜 인생의 가장 좋은 기억이 될지 모를 기획을 말씀하신 거다.
취업을 기다리는 공주 정안지역의 반 친구네 집을 방문하여 친구들과 냇가에서 물놀이도 하고 물고기도 잡아 어죽을 끓여 나누어 먹자는 것이다.
쉬운 일 같지만 담임선생님 단독으로 추진하기는 어려운 일이기도 해서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고마운 기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선생님이 삶을 인생을 아셨던 것 같다. 기껏해야 마흔도 안됐을 담임선생님이 말이다. 그때의 선생님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나도 인생을 모르는데 선생님은 역시 선생님이구나 싶다.
- 실제로 책상에 앉아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보다 고등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아이들끼리 몸을 부대끼며 즐거움을 쌓는 것이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추억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교실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모월 모일 아침 모시에 천안역 옆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 모이는 것으로 지침이 내려졌다. 당일에 보니 선생님은 막내아들까지 동반해 함께 하셨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시내버스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친구들과 버스를 탔던 곳이 혹시 온양 나드리 근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천안에 사는 이들은 이 지명을 안다. 온양 나드리. 하하하.
정석대로 추정해 보면 공주 정안이라는 곳은 시내버스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는 곳이다.
한편으론 어느 때인가는 충남 도고까지 농촌봉사활동을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가기도 했으니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나 싶다.
두근거리는 마음의 일부를 싣고 버스가 천안 외곽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버스가 가는 길마다 버스가 잠시 머무는 곳마다 길 옆에 큰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있기도 하고 길 옆에 정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어느 곳에서는 양철지붕이 버스 창문에 바짝 들이대기까지 했다.
공주 정안 어디쯤인가 버스가 서고 탑승했던 우리 일행 모두와 두근거리는 마음도 하차를 했다.
길이 비포장 신작로였는지 아스팔트 포장도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아이들의 옷차림은 기억이 난다.
자취생의 옷이 그다지 많지도 않아서였을 수도 있는데 내가 입었던 것은 청바지와 아이보리색 반팔티였을 것 같다. 위의 사진에 보면 갈색의 반팔 소매가 위로 올라간 티를 입고 있는 아이 때문에 가려져 정확히 무슨 옷을 입었는지 알 수는 없다.
어쩌면 수수께끼 같이 추측을 기억해 보는 것이 더 흥미 있을지도 모르겠다. 옷차림이 엊그제 일 같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게 이상하다.
사진 속의 저 아이들 중 일부는 세상에 없다. 37년이란 세월이 짧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사건이 생겨도 많이 생길 만큼 충분한 시간일 수 있다. 그 긴 시간이 내 기억 속엔 대단히 짧고 가까운 시점 안에서 벌어진 느낌이다.
고등학교 시절 추억의 세월이 아름다워 보일 것도 같은데 왠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시절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닌 데 말이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 중 몇몇은 조치원 인근이나 공주 멀게는 예산의 삽다리 등지에서 학교를 다녔다. 공주 정안에서 버스로 학교를 다니던 아이는 키가 큰 철희였다. 졸업을 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친구다.
그 아이가 집에서 리어카에 바리바리 솥단지와 부식재료 등을 싣고 냇가로 나와 우리를 맞았다.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냇가에 발을 담그거나 일부는 준비된 그물로 물고기 잡기에 나섰다. 일단 물에 들어가면 적당히 물에 젖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했다. 대부분이 위아래 할 것 없이 푹신 젖었다.
그렇게 두서너 시간의 물놀이가 끝났다. 펄펄 끓는 솥단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친구들은 궁금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당장 먹어 치울 기세다. 그 친구는 집에서 가져온 호박 깻잎 밀가루 고춧가루와 면(라면) 모두 집어넣고 끓였던 것 같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겠지만 요리 기억은 없다. 다만 솥단지의 향이 뭐라 할까. 구수하고 얼큰한 국물 향이 배고픈 내 위와 배고프지 않을 것 같은 시냇가에 가득히 스며들고 퍼져나간 기억뿐이다.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그늘 하나 없었던 곳이었던데 아이들의 얼굴엔 피곤함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사진을 보라!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즐겁다는 표정이다. 선생님도 마냥 아이 같다. 선생님에게 아쉬운 것은 소주가 없는 것일 뿐 일까. 술을 유난히 즐기셨던 선생님인데.
무슨 사고를 벌일까 내심 두려워 칠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대외 활동을 자제시키셨는데 선생님은 특별 나셨다.
아이들과 냇가로 들어가 돌무더기를 만들고 천렵을 하고
발로 물고기를 그물로 몰아 피라미, 빠가사리라고 불리는 동자개, 모래무지 등을 잡아오고 선생님은 그 친구와 잡아온 민물고기를 요즘의 레시피대로 푹 곤 다음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풀고 다진 마늘을 넣고, 양파와 파 그리고 애호박, 깻잎을 넣은 다음 국간장으로 대충 간을 하고 국수를 넣어 되직 하게 끓여 내 한 그릇씩 내어줬던 어죽 향의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확실하게 냄새와 이미지로 떠오른다.
식당에서 파는 어탕
지금은 어죽이 그렇게 맛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나에게는 추억의 맛이 더 그리운 것 같다.
돌아오는 버스 안은 천렵의 고단함으로 인해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