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대한 기억

by 이상훈

먼 산에 벌써 눈이 내리고 있는 듯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어머니는 연신 다리를 주무르시고 움직이실 때마다 신음 소리를 내신다. 지난 세월 얼마나 혹사시켜왔던 몸이던가. 그렇게 아픈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丙子年(병자년)생이신 어머니는 아마도 1958년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지 싶다. 딱 하나 있었던 결혼사진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렵다. 족두리를 쓰고 계셨던 그 흑백사진은 내 기억 속에만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그러기에 1958년에 결혼했다는 것도 단지 나의 추정이다. 여쭤보지 않고 그저 내 위로 계신 누님이 59년 생이 시기에 그렇게 추정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지 마 지나지 않았을 때여서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있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거나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감을 보였던 지난 3년이었기에 어머니가 결혼했을 당시만 하더라고 마을 곳곳에서는 인민군 부역자 가족과 경찰 가족 간의 끝없는 다툼은 계속 이어졌다. 66년생인 내가 그 일을 기억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어른 들의 말과 싸움에는 그런 이념 같은 것들이 녹아 있었다.


어느 날 22살의 어머니가 26살의 아버지를 만났다. 22살의 어머니는 무엇을 알았을까? 나이가 모든 것을 결정해 주지는 않지만 지금 사람들의 정신연령으로 비교해 보면 36세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하고 근거 없는 추정을 해보기도 한다.

단지 “철이 없을 나이였었겠다”를 쓰고 싶어서인데 굳이 철이 없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그런데 "철"이라는 것은 나이와 관계없이 얼마나 일찍 사회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딱히 무엇이 맞다고 단정하기도 쉽지 않다.


산업화된 요즘도 26살의 사내가 일자리를 갖는 것이 쉽지 않은데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던 당시에 일자리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왜 하필 땅 한평 갖지 못한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큰 할아버지 댁이야 논 몇 뙈기라도 있었지만 그것이 아버지에게 상속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아마도 중매쟁이의 농간이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 결정했을 리 없다. 술 좋아하시고 사람 좋아하셔서 외삼촌이나 이모부들이야 쉽게 찬성했을지 몰라도 외할머니는 좀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랬다면 오늘 어머니가 다리를 붙들고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시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1936년생인 어머니.

어머니의 본관은 밀양 박씨 문중이다. 그 동네 산 위에 올라서면 박씨 문중의 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명절 차례라도 올리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 이상은 예상해야 한다. 여기도 박 씨 저기도 박 씨 문패가 걸린 그 동네.


어머니는 그런 동네에서 3남 3녀 중 두 번째 막내로 태어나셨다. 圭자를 돌림자로 해서 순 자, 규 자가 본명이시다. 어머니의 형제분들 모두가 이 圭자를 돌림자로 쓰고 계신다. 어찌 보면 사내 이름 같다. 어머니의 남자 형제들은 어머니가 시집을 오기 전 먼저 결혼을 해서 외가 인근에 신접살림을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 걸음으로 모두 5분이면 닿을 거리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좋기도 하셨을 테고 어쩌면 할 일이 두 배 이상 많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손자도 봐주어야 하고 아프면 같이 아픔을 나누어야 했기에 말이다. 이모님들도 당시로 봐도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닌 곳으로 시집을 가셨다. 지금 갑자기 떠오르는 이모님 성함은 “공규”이다. 이모님들이 시집을 가신 곳은 외가댁에서 도보로 1시간 정도면 닿는, 대략 군 경계를 겨우 넘는 곳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셈이 빠르시고 모든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시다.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평범함을 뛰어넘는다. 자식이든 그 누구든 간에 말이다. 지금도 공책에 모든 것을 기록하고 계시다. 농사일과 농사에 적용되는 각종 자재나 비료 농약 등도 기록하시고 누구에겐가 빌려 준 것들도 꼼꼼히 적어 놓으신다. 이런 성격으로 자식들에게 쌀이나 콩을 나눌 때에도 저울과 됫박을 이용해 공평하게 분배하신다. 아마 사주에 금을 많이 가지고 계신 팔자이실 듯 싶다. 누구에게나 할 말은 하고 마는 어머니인데, 어렸을 때는 부끄러움이 크셨나 보다. 하루살이라고도 하는 하루는 멀쩡하고 하루는 심각히 아파 움직일 수 조차 없던 질병을 얻어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하신다. 위로 오빠들은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학업을 마치기 어려웠던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 말이다.

어머니의 딱딱함은 내 여식과 통화를 할 때면 여지없이 사라진다. “사랑해요”가 일상 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내 기억 속에서는 전혀 낯선 풍경인데 말이다.


어머니가 시집 온 거리는 분가한 외할머니 자식 가운데 가장 먼 곳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외로움도 컸을 듯하다.

1941년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시로 외삼촌께서 일본으로 징용되고 집에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두 분의 오빠 언니와 여동생이 있었다. 지금은 세분의 외삼촌이 모두 작고하시고 큰 이모님도 몇 해전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혈육은 작은 이모님 한 분만 살아 계신다.


시집 온 날의 서러움

아버지가 집을 비운 시댁은 어색하고 낯설기만 했을 듯싶다. 그런 가운데 시댁의 큰 어른 진지 상을 차려 드리는 일도 보통은 아니었을 것 같다. 어른에게 올리는 밥상을 차리는 것이 말처럼 쉽지도 않고 지금처럼 반찬거리가 많았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에 말이다. 추청 하건대 연세 있으신 노인분의 입안은 메말라 있어 거친 밥을 입안으로 옮겨 넣기 위해서는 따뜻한 국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린 것 한 토막이라도 밥상에 올려야 밥상 차림이 예의를 갖춘 것으로 이해된 시절이다. 아마 갓 시집온 새댁이 준비하려면 꽤나 눈물 콧물이 필요했을 듯싶다. 생선을 굽는 것 또한 화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짚불에 생선을 굽는 것이어서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평야지대에서 반찬류의 음식을 만들 때는 도시에서 숯을 이용했던 것과는 달랐다. 어머니가 자라던 지역에서는 주로 산에서 솔가지를 얻어서 밥과 반찬을 했기에 좋은 화력을 바탕으로 불 관리도 쉬웠다. 반면 들판 지역에서는 온전히 아궁이 안의 짚불만을 이용했기에 불 조절도 쉽지 않고 연기도 장난이 아니게 발생해서 잘못 다루면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다.

댁 큰 조부의 밥상이 물리고 밤이 되면 일자로 길게 늘어선 아랫집에서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셨겠지.

겨울밤은 길고 석유 등불의 불씨가 문풍지 사이 바람에도 잠시 놀라기도 했겠다. 그렇게 아버지는 늘 늦으셨다. 어머니는 베갯잇 등에 수를 놓으시고 가끔씩 들려 나오는 꼬르륵 소리에 한숨이 커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밥에 여동생과 함께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군밤이나 고구마를 화롯불에 구워 먹던 기억들이 생생했을 것 같다.

어머니는 큰 시댁에서 그렇게 가장 좋았을 신혼시절을 보내셨다. 내가 기억하기로도 어머니는 한동안 숯을 이용한 다리미로 큰할아버지 한복을 다리시고 동정을 교체하셨다.


벼 베러 가시는 어머니

60~70년대의 평야지대에 산다는 것은 배고픔에서 조금은 해방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기도 한다. 아마 평야지대의 연간 수입이 산골이나 어촌의 수입보다 1.5배 이상은 넘어서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어쩌면 산골에서 평야지대로 시집을 와 알곡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행복 그 자체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산골이나 어촌이나 여성들에게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했고 그 노동력에 걸맞은 먹거리를 장만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낫을 들고 들판 나가 벼를 베는 노동도 어쩌면 충만한 행복감을 갖게 할지도 모르겠다. 기억 속의 일부에서 어머니가 벼 베는 장면이 있다. 벼를 베는 시절엔 의례히 서리가 와 있었고 밭에는 배추와 무들이 그렇게 튼실할 수가 없었다. 어디 선가 밤늦게 까지 탈곡하는 소리가 들렸고 어머니의 목에 수건을 두르고 팔 토시와 장화를 신으신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평야지대와 산골이 경제적인 면에서 지금은 차이가 거의 없고 오히려 산골지역의 수입이 더 많기도 한데 마시는 음용수에 있어서는 아마도 산골이 상당히 우월했다.

물론 어머니가 태어나신 곳도 논과 밭이 있었지만 인근에 산이 많아 시집을 온 평야지대와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집집마다 우물이 있었고 맑은 물이 항상 넘쳐 나왔다. 그곳에 밭에서 나는 수박과 참외를 넣었다 먹으면 정말 여름 더위가 저만큼 물러가곤 했다. 평야지대에서는 그런 호사를 기대할 수 없었다. 마시는 식수가 영원한 난제였다. 산골의 경우에는 옹달샘도 많아서 1 급수 이상의 맑은 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평야지대에는 그런 샘물이 없으니 3 급수 정도의 농수용 물을 받아서 흙탕물을 침잠시켜 식수와 빨래용 물로 사용했다. 가끔 아니 자주 그 샘물에 개구리나 뱀이 수시로 출몰을 하는 바람에 익숙하지 않은 아낙네들은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러 동네 전체가 들썩 거린 적도 있다. 또한 수질 오염으로 아이들은 많은 질병에 걸리기도 했다.




남동생이 태어났을 즈음

동생이 태어난 날이다.

어머니가 어두컴컴한 방에서 혼자서 아이와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문은 닫혀 있고 닫힌 문 앞에는 붉은색 고추가 끼워진 금줄이 쳐져 있었다.

아무튼 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외할머니가 계신 것 같기도 했는데 어머니 누워 계셨던 안방에서는 다른 이가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덧붙이면 내가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다는 기억도 한 편에 가지고 있다. 그때 내 나이는 네 살이었다.

가끔 군용 바지에 진갈색 스웨터를 입 있는 아버지가 양갈래 머리를 하고 진청색 바탕에 노란색 줄무늬가 그려진 티를 입은 여동생을 안고 논길을 지나 작은댁에 가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친근하게 느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인 듯싶다. 언제나 엄한 모습으로 기억되기에 말이다.



허리띠와 빨간 바지

어느 날 어머니가 붉은색 계열의 바지를 사주셨다. 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이나 되었을까? 왜냐하면 우리 반 여자애의 언니가 6학년 무렵이었던 같다. 같은 반 여자애 언니가 나와 똑같은 바지를 입고 운동장에 나와서 뛰어놀고 있었는데 같은 바지를 입고 있는 나에게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 한 기억이 있다. 그 바지에 대해 나는 허리띠를 유난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의 바지는 주로 운동복이나 고무줄을 넣은 바지 일색이었다. 모든 바지가 그러하니 지금처럼 흔한 가죽 허리띠 하나 쯤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날 작은댁에서 제사가 있었는지 상이 차려지고 인절미가 만들어지고 많은 친척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상황이 기억난다. 나도 그 상황 속의 하나였는데 나 그 빨간 바지를 입고 혁대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보자기 천을 길게 말아 끼워 넣어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왜 허리띠를 사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의 혁대는 국방색의 군용 혁대 밖에 없었던 듯싶기도 하다. 어머니는 한편으론 나에게 꼭 맞는 옷 대신 한 치수 큰 바지를 사주었다. 밑단은 항상 접어 입어야 했고 허리가 헐렁했던 바지는 고무줄 바지에 비하여 쉽게 흘러내렸다. 초등학교 시절 몸에 맞는 새 옷을 입어 본 기억이 없다.



문풍지

옛날 집 방문은 한지가 붙여진 단열이 거의 안 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겨울철 아침 문고리에 손을 대면 쩍쩍 달라붙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른 아침 냉기가 감도는 부엌을 어머니의 움직임으로 불 냄새 밥 냄새가 가득 채워지면 그제 서야 나는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가마솥에서 퍼 주신 따뜻한 물로 고양이 세수를 하곤 했다.

그때의 설 명절은 겨울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서 어머니가 가마솥에 한가득 물을 데우고 형제들을 씻기셨다. 거기서 나온 때가 한 양동이는 될 듯해서 까마귀도 울고 가겠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불리지 않은 몸을 당시 사용되던 “이태리타월”로 밀면 정말 견뎌내기 어려운 아픔이 일어났다. 동시에 4형제와 한 바탕 거사를 치른 어머니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옴팡집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작은 초가집을 옴팡집이라고 한다. 우리도 우리 집을, 아니 부모님들이 그러셨나, 옴팡집이라고 불렀다. 옛 우리 집은 조그마한 마루 하나에 토방도 작고 헛간도 작고 부엌도 솥단지 3개면 더 이상 걸 수도 없었던 집이다. 그 집에서 6명의 가족이 엉켜 살아냈다. 어느 날 방 창문이 한지 창호문에서 유리문으로 바뀐 날이 있었다. 집이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마늘장사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해부터인가? 외지로 마늘 장사를 나가셨다. 혼자는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같이 하시기도 했는데 주로 온양이나 천안 혹은 멀게는 수원까지 나가서 팔고 오셨다. 벌이가 좋은 날의 어머니 얼굴은 내가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 던 어느 날 육교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졌다고 하시는데 어머니 입술에 딱지가 앉아 있고 앞니 일부가 깨져 있었다. 넘어지실 때의 창피함과 아픔이 왼쪽 뇌를 타고 지나갔다.

먼 장으로 가실 때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동네에서 버스를 타지 않고 5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가서 직행버스를 타고 가시기도 했다. 그때에는 아버지가 자전거로 마늘 짐을 날라 주고 오시기도 하셨는데 직행버스가 멈춰 서던 곳은 구양도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십여분을 차로 이동하면 장항선이 지나는 신례원역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거기서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이나 서울역으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원 등지로 마늘을 팔러 나가셨다. 늦은 밤 걸어서 집에 돌아오는 일을 한 동안 반복하셨다. 그 일은 결혼하시고 20년이 지난 후부터였지 싶다. 그런 경험으로 내가 살았던 영등포나 대방동에도 걸어오시기도 했다. 지금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는 먼 옛날이야기이다.



고구마튀김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요리하는 것 이외에 달리 취사할 도구가 마땅치 않았다. 다만 석유곤로가 시골에도 보급되어 간편한 요리들은 석유곤로를 통해 하곤 했는데 아이들끼리 라면을 끓여 먹기에는 그만이었다.

우리 집에 석유곤로가 생기고 얼마 후였는지는 모르지만 고구마튀김을 먹고 싶다고 간청을 해서 겨우 한 번 정도 어머니가 고구마튀김을 해 준 기억이 있다. 고구마튀김이었으니 아마 고구마 수확 때가 지난, 즉 가을걷이가 한창 지났을 때였으리라 추정된다. 모처럼의 기름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고구마 향, 밀가루 반죽, 콩기름 모두가 잊을 수 없는 향과 맛이다. 그날 어머니 옆에 서서 어머니가 기름 위로 떠오른 고구마튀김을 건져내자 마자 연신 호호 불며 먹는 모습이 귀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어머니께 그런 표정은 느껴보지 못했다. 마흔 초반의 어머니는 그때 무표정하셨다. 그래도 어머니 옆에서 혹은 장독대 앞에서 맛을 보았던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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