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방금 전까지 출렁이는 바다였다. 밀도 높은 것들로 가득한 깊은 해저면의 어두움이기도 했다. 그때의 몸은 딱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풀어질 것 같지도 않은 밀도가 계속 높아지는 상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내 안의 응어리처림 쪼그라들었다. 의지대로 몸을 쉽게 펼 수도 구부릴 수도 없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깊은 심연이 무서움을 자아내고 그 심연의 깊이에서 나는 기괴한 소리가 자유의지를 방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몸이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분명했고 가장 작은 형태의 입자로 응축되어 가는 것도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상대적으로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무한정 빨려 들 것만 같다. 해수면을 뚫고 햇볕이 내 입자에 부딪힐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응축된 가장 작은 입자 크기의 물이었다. 한 번도 햇볕이 그곳까지 닿으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었고 무언가가 내 몸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 날 잠시 잠깐 햇볕이 심연에 닺았다. 레이저 광선처럼 긴 빛줄기를 그리면서 말이다. 물론 햇볕이 나를 위해 그곳을 비춘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그 햇볕으로 인해 응축되고 있는 몸이 풀려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온통 잿빛이다. 물 알갱이 같기도 한 것들이 가득한 공간이다. 몸은 부분 부분 떨어져 나간 듯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사방의 찢긴 것들이 서로를 감싸주고 있다. 저들도 저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는 알까? 이렇게 올라와 보니 갑자기 평등에 목매였던 것처럼 모두가 평등한 것들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물론 내 몸이 찢겨 떠나 온 곳도 망망대해였으니 그때도 평등하기는 마찬가지였을까!
그때는 정말 어디로 튈지 몰랐다. 어느 때는 파도에 휩쓸려 파도인 것 같다가도 어느 사이인가는 수면을 밟고 올라서는 따스한 공기와 한 몸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밤이 되면 암흑의 억눌림과 비구름으로 다시 바다가 되기도 했다. 그때는 정녕 내가 파도였는지 파도와 맞닿은 공기였는지 형체와 의식 모두 불분명했다. 간혹 기분 좋은 때도 있었다. 해저 깊숙이 갇혀 있을 때는 의식조차 없었지만 순간 해수면 위로 떠올라 강력한 햇살의 힘으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수면 위를 붕붕 떠다녔을 때는 지금처럼 눈송이가 되어 공기 중을 유영할 때 갖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의 그것은 찰나였다. 넘실거리는 파도는 언제나 근심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긴 시간은 아니었을지라도 따스한 공기라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이 밤이 되면 무섭게 무거워져 바다 위에 내려앉았다. 이처럼 매 순간 일정하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 몸과 마음 그리고 형상을 분간하려는 의식을 힘들게 했다. 어쩌면 그런 환경보다 바닷속 환경이 고단하지만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판단을 하는 데는 더 실효적이었지 싶다.
어느 순간 파도를 긁고 지나가는 갈매기 물갈퀴에 묻어 있다가 따뜻한 훈풍과 함께 갑자기 높이 솟아오른다. 전에도 가끔 물 입자에서 공기 입자로 잠깐씩 변신하면서 해수면 위를 넘나들 때도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보이는 물들로 인해 공기 입자로 변신된 것을 알지 못했을 때다.
높이 떠오른 그날.
모든 것들과 갑작스럽게 이별을 했다. 언제나 함께 할 것 같았던 친구에게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이별한 것은 슬픈 일이었다.
햇볕이 강하게 비추었던 그날.
전혀 예상 밖으로 갈매기 물갈퀴에 묻어지고 상층부로 밀어오려 지는 압력에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떠올라 더운 공기 입자가 된 그날.
그날은 몸의 이곳저곳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형체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 뿐이다. 어쩌면 파도 위를 맴돌거나 파도와 함께 휩쓸려 다니다 낯선 배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거나 하는 것이 더 편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언제 어떻게 여기에 왔고 무엇으로 인해 어떻게 변했는지 갑작스럽게 벌어진 탓에 나의 인식은 형상 의 변화를 쫓지 못했다. 모든 게 나 일 수도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뿐이다.
순간의 반짝임이나 수면을 순간적으로 핥고 지나는 바람 같았다. 물 입자에 빛이 닫으면서 몸이 어두운 압력으로부터 풀려났고 맹렬한 기세로 떠올라 바다 위의 공기와 접하는 면에 다다랐다. 그런 힘을 또 느낄 수는 없을 듯싶다.
어느 사이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은 부드러운 솜털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구름이다. 천지사방이 솜털 뭉치처럼 얽혀 있는 구름이다. 각각의 것들이 어디서 올라왔는지 나와 같이 갑자기 바다에서 솟아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출신은 알 수 없도록 같은 색과 일정한 크기로 붙어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작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갑자기 변한 내가 이렇게 따뜻함을 받아도 되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점점 더 나에게 비치는 햇볕 양도 많아졌다. 나를 감싸는 솜털들도 더 풍성해졌다. 그럴수록 몸은 무거워져 갔지만 그 따뜻함과 촉촉함은 잊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내가 갑자기 들어 올려져 나누어지고 보이지 않게 될 때만 하더라도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의 높이와 압력 차이를 경험했다. 압력에서 벗어나게 되니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형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형체에만 의존하던 존재와 의식은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정말 실존은 했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가 되었다. 그때 사방은 순간 놓쳐버린 의식으로 너무 어두웠고,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해수면에 떠오른 것과 동시에 그 순간 해수면을 스치면 날던 갈매기의 물갈퀴에 묻어난 것도 같은 시간이었다. 이것을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왜 나만 이렇게 들어 올려진 것일까? 그렇게 되려고 된 것뿐인데 당시에는 갈매기가 그렇게도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이제 눈앞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며 몸집을 부풀리고 더 많은 습도를 머금게 되었다. 그러자 어느 사이 주변 것들도 나와 비슷한 몸집을 만들어 냈다. 몸에 부딪히는 것들이 부드러우니 많은 것이 편해졌다. 바다에 있을 때는 넓은 바다를 보면서도 넓은 생각을 갖지 못했었는데 이곳에서는 경직된 것들이 사라지니 많은 것을 보고 돌아볼 수 있었다. 나에게 와닿는 것들도 욕심이 없었다. 서로가 가까이 위로해주고 보듬어 주면 부드러움이 더 커지고 따스해졌다. 환경이 바뀌니 그런 마음은 일상이 되어갔다.
주변이 커지고 세를 이루니 이유를 알 수 있는 움직임이 생겼다. 작은 무리로 공기 입자와 같을 때는 몰랐는데 나의 몸에 힘이 생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내가 가야 할 곳들이 생겼다. 압력이 낮아진 공간을 대신 채우기도 하고 더운 바람이 찬바람을 타고 넘거나 할 때 내 몸 안에도 차가운 것이 밀려들어와 물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물방울은 내가 바다에서 느꼈던 그것과는 달랐다. 차갑기만 하고 모질기만 하던 그 물 입자와는 참 많이 달랐다.
나의 생각도 커져갔다. 순간 떠오르고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잡히지 않아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지금 땅에 내려앉았을 때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또다시 깨달았다. 그 보송하고 솜털 같은 것이 눈송이였다는 것도 그 시점에 알았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내가 공기 입자였는지, 물 입자였는지, 눈송이였는지 잘 모르겠다. 단지 이렇게도 변화할 수 있구나 정도의 생각을 할 뿐이었다.
나의 몸은 한 곳에 있지 않았다. 의식은 이제 바다였을 때의 내 몸을 잊어가는 정도였다. 어느 순간 따뜻한 공기의 한 입자로 들어 올려 습기를 머금은 차디찬 공기를 맞대자 몸이 서걱거린다. 나의 입자에 윤곽이 도드라지게 생기고 나의 주변 것들도 점으로 된 흰 무리가 되어 하방성을 띄었다. 공중에 머물기에는 몸이 점점 더 무거워져 갔다. 의식이 바다에 있을 때와 같이 다시 혼돈 속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다행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때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다. 나와 결이 다른 공기를 타고 유영하는 일도 재미있었다. 세상이 조그마하게 보이고 움직이는 많은 것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욕심이 있다면 이대로 유영하면서 어느 날 내가 바다였을 때 바닷가 인근의 갈대숲에게서 느꼈던 흔들림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갈대숲을 찾아야겠다. 제발 내가 밀어 올려진 곳이 갈대숲이 넘실대는 시골 어촌이었으면 좋겠다. 겨울날의 황량함을 내가 가진 하얀색 솜털로 가득 채워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일지 모른다.
이제 작게 만 보이는 곳으로 내려앉아야 할 때다. 그곳이 갈대숲 위에 눈꽃이었으면 좋겠다. 나를 감싸던 것에서 갑자기 떨어져 나와 어느 사이 몸 사이의 결속력은 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상태가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내려왔지만 어느 눈송이는 지붕 위에, 어느 송이는 나뭇가지 위에 어느 송이는 마루 밑 댓돌 위에, 어느 송이는 장독대 위에 내려앉는다. 갈 곳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다들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 같다.
사방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으로 가득하다.
벌써 일부는 길 위에서 내려앉아 밟힘을 당하기도 하고 일부는 앞마당에 내려앉아 아이들의 눈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다 어느 날 빛이 오면 그들과 나는 다시 그 따스한 공간으로 옮겨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