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음)
올 해는 부친 기일 27주기를 맞는 해이다. 해가 지날수록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지고 그러다 보니 부친의 삶에 대하여 충실히 이해해 보려고 한 적도 많지 않다.
다만 김장철을 맞아 조카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새삼 떠올려 보게 되었다.
아버지. 이준우 요셉(아명 병호)
나는 아버지와 34년간의 세월의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었다고 들었다. 따라서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보내고 아기 키울 형편이 안되었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해에 재혼을 하셨지 싶다.
2021년인 올해 큰 고모의 나이가 86세인 것을 감안하면 조부의 재혼은 1934년 이전에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의 재혼에 따라 아버지는 계모의 손에 의해 14세가 될 때까지 정도까지 자라셨다. 결손 가정은 아니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일제 강점기였다. 요즘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였다. 아버지가 네 살쯤 되었을 때 여동생이 태어났다. 지금 86세가 되신 고모님이시다. 아버지의 계모에게는 첫 번째 친자식이었다. 집안의 관심은 온통 그 아기에게 모이는 것은 당연했을 것 같다. 아버지가 태어났고 자라셨던 곳은 약간의 구릉과 임야가 있던 지역이고 얼마 정도만 더 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듣기로는 초등학교 시절에 태안 읍내인 남문리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농사를 짓는 집이 아니었기에 일정량의 땔감은 항상 필요했을 것이다.
가끔 조부댁 다락에 오르면 많은 흥미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중 한자로 가득 채워진 나침반이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것을 몇 개나 가지고 계셨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관 등의 일을 하셨을 것으로 짐작했다. 나중에 그렇게 들었고 말이다.
조부의 직업 특성상 집을 자주 비우셨을 것 같다. 집안에서 계모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어려서부터 키우셨기에 정도 드셨을 만 한데 20대 이후의 아버지 모습으로 봐서는 그다지 정을 들이진 못하신 듯하다.
육체적으로 어느 정도 자라면서 집안일과 밭일 그리고 저녁에는 나무하는 일을 거드셨을 것으로 보인다.
혼나기도 많이 하셨는지 나도 자랄 때 아버지로부터 혼난 기억이 적지는 않다.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행동이 그렇게 굼뜨냐”, “빨리빨리 해오지 못하고” 등의 말을 들으셨을까....
그럼에도 아버지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안에는 남자가 아버지와 큰아버지 두 분이었고 계모의 어린 여자아이만이 있었으므로 집안일을 도울 남자는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즈음 그러니까 1946년 해방이 된 다음 해 아버지 나이 14세 무렵에 할머니께서 작은 아버지를 보셨다.
아마도 집을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지 싶다. 없는 살림에 입도 줄여야 하고 중학교를 가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므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갈 수 있는 곳은 친척 집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근인 서산에서 커다란 사과농장을 하셨던 아버지의 고모 댁으로 거주를 옮기신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일손을 도우며 해방 이후 1년 정도 (15세 정도) 머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아버지의 사진이 제법 많이 있고 사진 속의. 아버지는 멋도 많이 부리신 듯했다. 이곳에는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형님도 계셔서 아마도 다른 곳으로 또다시 거주지를 옮겨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옮긴 곳이 현재의 합덕이다.
아버지의 백부께서는 여러 가지 가정문제로 연유는 잘 알지 모르겠으나 고향을 떠나 생면부지의 합덕에 까지 내려와 농사를 짓고 계셨다. 아버지가 거주를 옮길 당시만 해도 합덕에 계신 큰할아버지는 대를 이을 자식을 얻지 못하고 계셨다. 따라서 큰 할아버지 댁에서 수양아들로 기거하셨는데 18세 전후 한국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의 큰 댁에도 아들이 태어나게 됐다. 아버지는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 큰 댁의 어려움 등으로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셨다.
보통 그지역에서는 배편을 이용해 인천으로 들어가기가 용이했다.
아버지 나이 19세부터 21세까지는 한국 전쟁 시기 이도하고 서울에 정주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식사와 잠자리는 어디서 하셨을까 전쟁 직후 제대로 기숙할 때까 마땅치 않았을 텐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부친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부모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았기에 표현하지는 않으셨다.
아버지의 급하고 빨리 마무리 지으려 하고 도피하려 하고 했던 성격 유형은 엄마의 빈자리가 주는 불안감, 전쟁의 공포,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는 강박 등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 전쟁이 끝나는 1953년, 아버지 나이로는 대략 21세 정도에 군대를 가셨을 것 같고 군대생활 기간은 다 마무리하지 못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동안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셨다. 어쩌다 미군부대에 들어가셨는지는 알 수 없다. 제법 넉넉한 생활을 하신 것은 대략 23세부터 25세 전후였다. 이 시기 일기도 많이 쓰시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신 듯 많은 단어장과 일기장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계시는 태안보다 아버지의 사촌인 큰 할아버지 댁 고모님들이 계시는 합덕을 더 많이 찾으셨다. 태안은 이복형제들이 가득한 반면, 합덕은 아버지를 잘 챙겨주고 따르는 고모 등 사촌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결혼도 하셨다
아버지의 큰댁과 지근거리에 사시다가 예산으로 시집을 가신 외할머니의 중매를 통해서다. 인물도 말끔하시고 성격도 대외적으로는 호탕하시고 큰댁에 돈도 잘 갖다 드렸으므로 여러 가지로 결혼을 하기에 적합했다.
결혼시기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7년이나 58년도가 아닐까 싶다. 지역적 특색을 본다면 버스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병원도 미비했던 시골 지역이다. 처가에라도 갈 요량이면 구양도 다리를 건너가거나 배를 타고 선장으로 해서 도고를 지나 철길로 먼 길을 도보나 자전거를 이용해 가셨다. 내가 태어난 후에도 외가에 방문하는 방법에는 변화가 없었다.
59년도에 누님이 태어나고 61년, 63년에 차례대로 돌아가신 형님이 들이 태어났다. 65년도 이전에 형님 두 분께서 돌아가셨다. 아버지 나이 33세 전이다. 당시 아버지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신광 탈곡기나 대광 탈곡기 등 벼를 타작하는 농기구 회사에 다니셨다. 이 회사들이 법정 다툼에 휘말리기 전까지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회와 사람 관계를 잘 모르는 한창 젊은 나이였다. 아버지 나이 30대 초반에 너무 많은 사건들이 터진 것이다.
1969년
아버지 나이 37세 정도에 태안에 계셨던 작은아버지가 결혼을 하셨다. 1970-71년쯤엔 아버지의 사촌인 합덕 당숙이 결혼을 했다. 태안은 물론 합덕에서 결혼 풍경이라고 기억되는 장면이 내 기억과 실제 사진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1972년에 아버지의 아버지인 조부께서 돌아가셨다. 내 기억으로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년여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셨다. 할머니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소천하신 후 100일 동안 방안에 제대를 차리고 문안 인사를 드렸다. 방 한편에 마련된 공간. 그 공간은 한지로 천정부터 바닥까지 닿도록 한 사각 모양이었다. 그 안에는 제대가 있었고 제대 위에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모셔져 백부께서 아침저녁으로 식사와 문안을 올리셨다.
아버지 나이 40세.
아버지가 어느 날 허연 점퍼를 입고 어깨에 새끼줄로 꽁꽁 묶은 박스를 메고 오신 기억이 가득하다. 난 당시 지금의 마을회관 근처 농협 창고가 있던 곳에서 놀고 있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의 초상을 치르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보았다.
불혹의 아버지
자식을 몇이나 둔 아버지
할이버지와 따로 살아간 세월이 25년 이 지나도록 할아버지는 자식인 아버지가 보고 싶지는 않으셨을까? 아버지 혼자만 속으로 애타게 부모를 그리워했을까?
아버지에게는 6명의 이복형제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6남매의 배다른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 충실하셨을 것 같다. 잠시라면 몰라도 또 다른 이의 자식인 아버지가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덜 했을 것 같다. 나름 할아버지의 큰 형을 믿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께서 친할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면 다른 성격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형제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멋있고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친할머니의 제사는 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아버지께서 모셨다. 아직도 초롱불 켜놓고 떡을 만들고 아버지의 합덕 사촌형제들이 분주하게 오갔던 기억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인 1979년 아버지는 47세 우리 나이로는 48세였다. 이때 아버지는 직장을 잃고 동네 일을 많이 했다. 집을 짓거나 붉은 벽돌로 굴뚝을 쌓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집에는 관련한 도구와 연장들이 가득했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도 졸업식에 부모님들은 참석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모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계모인 태안 할머니와 할머니의 첫째인 고모가 오셨었다. 아마도 사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위해 천안에 왔을 때는 아버지께서 동행을 했다. 방을 구하고 식량을 나르고 많은 기억이 생각난다.
나의 대학 합격 발표 날 아버지께서 많이 기뻐하신 듯하다. 기어코 나와 함께 학교에 직접 가서 게시판에 붙은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셨다.
졸업 후에 취직을 못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가끔 나를 찾아 주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막걸리를 사다 드리면 많이 좋아하셨는데....
그 후로 아버지는 내가 신길동에 살 때도 한 번 오신 적이 있다. 아마도 1992년이었지 싶다. 그리고 3년 후 내 나이 30, 아버지 나이 만 6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기나 긴 시간이었던 듯싶은데 지나고 보니 슬프고 안타까운 시간이다.
시간을 뒤돌린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주어진 하루를 소중히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