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형 백화점의 외벽이 휘황찬란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꼭 가보아야 할 곳이 되어버렸네요. 동파방지 안내 문자도 계속 들어옵니다. 따뜻하기만 하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사람뿐 만아니라 많은 것들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 분들의 뉴스가 텔레비전에 많이 등장합니다.
노인 몇 분이 곰방대를 입에 물고 양지바른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짙은 황갈색 털모자에 같은 색 계열의 스웨터를 입고 있네요. 신발도 검은색 털 고무신입니다. 발목이 털로 마무리된 보편적인 농촌 분들의 겨울용 신발입니다. 어쩌면 이 분은 외출을 하려고 차려입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처마에서 고드름이 햇볕에 반짝입니다. 순간 무게를 견디지 못한 고드름이 마당 위로 뚝 떨어져 산산조각이 납니다. 낮 기온이 올라가면서 언 땅이 녹아 질퍽질퍽해지고 있습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지 않던 시대엔 정말 많은 시간을 진흙과 싸워 온 것 같네요.
겨울 방학 때면 해가 한지 격자무늬 나무 창호 문을 두드릴 때까지 이불속에 있을 수 있는데 개학을 맞은 오늘 아침은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길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샘터 주변의 작은 느티나무와 참새를 잡기 위해 새 그물을 설치한 복숭아나무에 서리가 하얗게 생겼습니다. 상고대라고도 하지요. 나무에 형성된 상고대를 나무(樹) 서리(霜)를 써서 수상(樹霜)이라도 합니다. 서리가 내려앉다고 쓰는 것도 어쩌면 맞지 않는 것이겠지요. 과냉각된 작은 물 입자들이 물체와 만나 만들어진 것들이니까요.
서리가 앉아 있다는 것은 온도가 많이 낮다는 것이겠죠. 거기에 바람만 조금 불면 한기가 성근 섬유조직을 뚫고 몸속을 파고들어 움츠리게 만들어 버리지요.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을 끼워도 냉기를 다 막아 주지는 못합니다. 요즘 장갑이라면 아마 추위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옛날 분들이 서리와 관련해서 단호함이나 강직함을 나타내는 경구로 많이 사용했는데 왜 그랬을까 하고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雪上加霜이나 秋霜같다. 이런 말들을 놓고 보면 서리가 눈 보다 더 춥다고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겨울의 한가운데보다 간절기에 느끼는 기온의 변화가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두툼한 양말에도 하얀 서리가 묻었네요. 고무신이 발목을 완전히 덮어주지는 못해서 이지요. 하얀 것은 얼음보다 차갑게 양말 안으로 스며듭니다. 재빨리 털어내도 굵은 섬유질 사이에 박혀있는 것들이 보기에도 참 시려 보입니다. 그래도 서리가 내려앉아 감싼 나뭇가지가 눈이 내려앉은 나뭇가지보다 더 다양한 무늬와 밝은 색을 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잠시 지나가며 나뭇가지 위의 수상을 머리 위에 흩뿌립니다. 일부가 머리 뒤쪽으로 해서 목으로 들어옵니다. 아마 옛 선인의 추상같은 명령이 이 만큼 강렬한 차가움을 주는 것이었을까요.
길옆의 이름 모를 마른 풀더미 위에도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눈길을 걸을 때처럼 내가 지난 자리에는 고무신 자욱이 남아 있습니다.
발끝이 아려오기 시작합니다. 손가락으로 꼭 눌러주면 통증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겨울철에 가마솥에 끓인 물을 받기 전 차가운 항아리 물에 손을 담글 때 느꼈던 큰 시림이 다시 생각납니다. 한 자세를 오래 하면 생기는 그런 저림과 시림이 끊임없이 발가락부터 시작해 발 전체로 퍼져옵니다. 고무신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방한 효과는 원래 없었는 데다 이젠 방수 기능의 역할도 어렵게 되었네요. 다만 길바닥의 딱딱한 돌멩이나 사금파리로부터 발바닥이 상처 나는 것을 막아 주는 정도는 되겠지요. 이제 양발을 꼬아가며 발가락에 힘을 주어 모아 보기도 하지만 발 시림이 가시지는 않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일론 소재 양말은 섬유 조직도 섬세함이 떨어지고 보온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의류 혁명이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말이죠. 아토피가 심한 사람은 정말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섬유 자체가 두툼해 따뜻할 것 같지만 요즘 싸구려 등산양말보다도 훨씬 기능이 떨어지지요. 땀 배출이 쉽지 않아 등교해서 조개탄 난로에 말려주지 않으면 동상에 걸리기 쉽습니다.
겨울철에 고무신을 신고 등교를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미끄러집니다. 고무신 바닥이 얼마나 미끌미끌한지 그냥 미끄럼 타듯 걷는 편이 훨씬 편하기도 하죠. 해가 떠오르면 길바닥은 진흙으로 변해 고무신 안으로 진흙물이 들어오기도 하죠. 집에 와서 신을 벗어 보면 축축한 양말에 흙이 엉겨 붙어 있습니다.
수출 100억 달러 기념 홍보물이 학습 게시판에 붙어 있네요. 그래서인지 내가 신는 것들도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