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by 이상훈

어린 시절 학생용 자전거를 갖고 있는 아이가 동네에서는 딱 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외아들이었고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탓인지 집에서도 남다른 대우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살림살이가 그렇게 넉넉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우리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버지들이 탔던 신사용 자전거를 가지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각자가 각자의 방법으로 서로를 의식하며 배우다 보니 타고 넘어지는 일도 더 많았지만 타는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자전거를 타려면 우선 널찍한 마당이나 신작로가 필요했다.

해방 이후 혹은 한국전쟁 때 선교사나 외국 군인들이 찍은 것으로 보이는 논밭 사이의 신작로를 오래된 필름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요즘 많아졌다.

그런데 당시의 신작로는 도로 폭만 기존의 마을길보다 좀 넓다 뿐이지 직선 구간을 길게 갖고 있지 못했다.

자동차 운행 연습도 그렇지만 자전거를 처음 타 보는 이들에게는 긴 직선도로가 필요하다. 자전거 운전 초보에게 핸들을 조작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직선주로에서는 자전거를 힘차게 가속시켜 올라타기만 해도 회전 운동을 하는 바퀴의 힘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페달을 밟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는다.


농번기가 끝나고 신작로와 집 마당이 그렇게 번잡스럽지 않을 때면 방과 후 자전거를 끌고 나와 노는 아이들이 많아진다.


첨에는 요즘 아이들이 퀵보드 타듯 하는 단계를 거친다. 자전거 페달에 한발을 올려 놓고 한발로 땅을 지치며 타는 데 어느 정도 균형을 잡을 줄 알게 되면 비로서 안장에 오를 수 있다.


자전거 타는 연습도 혼자는 보다는 여럿이 같이 해야 흥도 나고 경쟁심도 붙어 요령을 잘 터득하는 것 같다. 몸에 익숙해지기 전부터 요령을 조금 더 추가하면 아무래도 빨리 타게 되는 것처럼 느낀다.


나는 초3인가부터 아버지가 타 던 넓은 짐받이가 장착된 자전거를 끌고 다녔다. 보통 어린이용 자전거보다 무게가 훨씬 나가는데 한 번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는 것이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아마 자전거를 일부러 배우라고 했거나 해야 할 숙제로 주어졌다면 싫증을 내고 쳐다보지도 않았을 듯싶다. 그때는 무슨 경쟁심이었는지 넘어지고 넘어지길 반복해 가며 무릎이 깨지고 아킬레스건 쪽의 뒤꿈치 살갗이 자전거 체인 보호대에 부딪혀 벗겨지는 고통을 참아내며 참 열심히 탔었다.

그 이후 중학교 3년 내내 5킬로미터의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다. 자전거 통학이 버스보다 좋은 것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보았듯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느껴야 하는 땀냄새 등을 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겨울이나 봄가을에는 냄새가 덜하지만 비가 내린 날이나 무더위가 극심한 날에 차에서 풍겨 나는 경유 냄새 등과 땀 냄새가 섞이면 정말 차멀미를 안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물론 그 영화에서 보듯 여학생을 사귈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줄어들지만 말이다.

또 특별히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아도 허벅지 근육이 정말 튼실해진다. 현재와 같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도 아니었다. 그 당시 도로는 빗물에 움푹움푹 파여 있거나 자갈이 깔린 길이어서 보통의 다리 힘만으로는 자전거 페달을 밟아 나가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또 동네를 지날 때마다 합류하는 아이들이 늘어가는 것도 거대 자전거 군단이라도 만든 것인 냥 뿌듯한 느낌을 갖게 해 줬다.

지금 돌이켜 보면 누가 가르쳐 준 자전거 운전도 아니었고 후일 지금의 자전거 운전 배우기로 인해 자전거 통학의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많은 아이들이 타려고 선뜻 나서지는 않았을 듯싶다.


언덕 위에 있는 중학교의 교문은 자전거를 타고 오르기에는 경사가 너무 심했다. 교내 사이클부 선수들조차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애를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자전거를 밀어 교문을 지나오면 자전거 주차 공간은 벌써 만원이다. 자전거 주차 공간은 교실 밖 화장실 옆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그 자리가 꽉 채워지면 교실 옆 빈터에도 열을 지어서 자전거가 세워졌다.


자전거 색상도 다양했다. 자전거의 개성이 돋보이는 부분은 안장인 듯싶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교체율이 높은 부분이었다. 요즘과 같이 프레임은 다양하지 못해 천편일률이라고 봐도 욕을 먹을 것 같지는 않다.

안장과 프레임의 컬러가 그나마 형형색색이라고 표현할 만했다. 또 새 자전거는 휠과 살대라고 불리기도 했던 스포크나 핸들이 스테인리스로 말끔하게 도장되어 햇볕에 반짝였다. 오래된 자전거는 구부정한 노인들의 피부색과 같이 고단한 통학길을 몇 년 버텨내면서 휠과 스포크는 암갈색을 띠기도 하고 스테인리스 도장이 벗겨지고 녹이 슬어 우울해 보였다.


책가방을 자전거 핸들에 끼우고 다니는 아이, 자전거 안장 뒤쪽의 짐받이에 싣고 다니는 아이, 안정적인 것은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다니는 게 제일이다. 그런데 간혹 버스시간이 길게 남았거나 함께 가고 싶은 친구가 생기면 자전거 핸들 양쪽으로 책가방을 끼워 놓고 짐받이에 친구를 태우고 가는 경우도 있다. 운전자가 번갈아 가면서 페달을 밟지 않으면 정말 힘든 상황이다. 토요일에는 교련복이나 운동복을 입고 짐받이에 올라타 함께 가는 아이들을 정말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시내를 지날 때면 그에 따른 보상으로 빵집에 들러 빵을 먹거나 길에서 파는 호떡 혹은 단팥 색이나 우윳빛 하드를 하나씩 입에 물고 가기도 했다.

예전에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여의도 광장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자전거를 타는 이들 그렇게 많았다. 나는 중학교 3년간의 자전거 통학 기억 때문인지 광장을 한 바퀴를 돌고 나서는 더 타고 싶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전거로 5킬로미터를 통과하는 시간은 보통 50분 내외이다. 쉼 없는 페달질로 여름철에는 하복용 모자, 겨울철에는 동복용 모자 안이 땀으로 흥건하다. 어느 날은 동복이 너무 덥기도 하고 어느 날은 하복이 너무 춥게 느꼈었다.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는 아이들 가운데 과체중인 아이는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때도 부잣집에서는 과체중을 겪는 아이들이 있었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배가 나오면 사장배로 은근히 부러움을 샀던 시절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겪는 어려움은 계절요인이 크다. 기온이 내려가면 손끝이 시려서 고통을 참아야 하고 비가 오면 빗물에 옷이 젖는 무게감을 버티어 내는 것과 함께 진흙이 되어 버린 길바닥을 버둥거리며 올라서야 하는 굉장한 힘을 필요로 했다. 바큇살 사이로 토해 내 듯 흙과의 지난한 싸움이 자전거로 통학한 중학교 3년간의 기억이겠다.

내가 살던 지역은 80년대가 되기 전까지는 마을길 뿐만 아니라 읍내도 버스가 다니는 차로도 모두 자갈이 펴진 길이었다. 흙길은 날씨에 따라 운송수단의 이동에 어려움을 겪었기에 매년 어디에서 퍼 나르는 지 흙먼지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덤프트럭이 길바닥에 자갈을 주기적으로 펴 놓았다. 펴 놓은 자갈길을 일정기간 버스나 경운기 등 운송수단 등이 일정기간 지나다니다 보면 평탄화 되는 데 그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 도로는 자전거 통행에 거의 상극이었다. 타이어가 터지기도 하고 다리 힘 약한 아이들은 자전거를 끌고 이동해야 했다. 그런 날이면 도로의 본 주로에서 벗어나 농로를 달려야 하는데 가끔 농로는 농사용 물을 공급하려고 물길 내면서 움푹 파여 있기도 했다. 농로는 부드러운 질감을 갖고 있어서 자전거를 타는 데는 더없이 안정적이었으나 비가 내리면 깊은 수렁 같이 변해 외부의 침입에 격렬하게 반발을 했다.

또 자전거 통학을 하게 되면 마주하는 것이 고갯마루이다. 나의 통학로에도 “성낭댕이”라고 불렸던 서낭당길이 있었다. 물론 당집은 본 적이 없었고 그 옛날에는 아마도 언덕 위에 당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만 했을 뿐이다. 그래도 날이 저무는 저녁에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그 서낭당 고갯길을 지날 대 등골이 오싹했던 기운을 느꼈다. 서낭당 주변 야산은 소나무가 주로 자랐는데 청년들의 연애 장소로 이름이 나 있기도 하고 간혹은 연인들이 목숨을 버렸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간혹 자전거 라이트를 켜고 하교하는 밤길에는 동행하는 친구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교문을 같이 나섰던 친구 중 내가 살던 마을까지 함께하는 아이들은 거의 있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고 미래를 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다만 현재를 묵묵히 이겨내다 보면 좋은 것들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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