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니 행태 연구

by 이상훈

겨울 땅은 밤새 얼어 있다가 해가 올라오고 사위가 온기로 메워지면 얼었던 것이 점차 풀리기 시작한다. 내가 어렸을 적엔 방학 내내 아니 방학을 시작하기 전부터 겨울 땅은 이렇게 하루도 마를 새 없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봄을 맞았다.

뛰어놀 공간이 없던 아이들은 하루 종일 무료함을 견뎌내지 못했다. 아이들끼리 어른이 외출한 집에서 재떨이 남아 있는 담배를 피워도 보고 이불장 안의 이불들을 모두 드러내 방바닥에 깔고 레슬링과 술래잡기 등 밖에서 해야 하는 놀이들을 땀나도록 했다. 그러다 어느 사이 70년대 말이 되면서 농촌에 불어 닥친 가마니 짜기가 겨울철 농한기 수익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집집마다 가마니 기계 틀과 새끼 꼬는 기계 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농한기 수입원이 되기도 했지만 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는 괴로운 일들의 시작이었다.


가마니 짜기가 새마을 운동의 일환이었는지는 어땠는지 부잣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집집의 여유인력들은 새끼틀과 가마니틀을 하나씩 구매해 놓고 들판 지역에서 흔히 얻을 수 있는 벼를 수확하고 얻는 볏짚을 이용해 하루 종일 가마를 짰다. 수익 때문인지 가마니틀에 앉은 이가 화장실 가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지금 기억으로는 밥도 먹지 않고 일하는 철인 같았다. 지금의 기업이었다면 새마을운동을 가장한 노동착취였다.

가마는 대략 20개 묶음 단위로 포장돼 농협을 통해 수매되었고, 농촌 가정에서는 겨울철 농한기에 꽤 짭짤한 수입원이 되었을 것 같다. 아무리 바빠도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일하지 않는다고 집집마다 서방님들은 외출을 하고 가마니 짜는 일에 매달리는 이는 부녀자들이 다수였다. 여기에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자녀까지 짚을 부드럽게 만드는 일에 동원됐다. 짚을 그냥 사용하면 부서지고 고품질의 가마니를 제조할 수 없다. 부서지지 않도록 물을 촉촉이 뿌려주기도 하고 우선 짚을 부드럽게 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인다. 집집마다 짚을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은 다양했다. 일일이 떡메와 같은 방방이로 두들기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부터 짚을 도로 위에 규칙적으로 평평하게 펼쳐 놓고 짐칸에 무거운 돌을 실은 경운기를 이용해 짚단을 수 십여 차례 왔다 갔다 반복하면 짚이 아주 보들보들해졌다.

가마니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볏짚은 보통 길이가 긴 벼 품종을 사용했다. 그 당시 수확량이 좋았던 통일벼가 많이 재배되었다. 벼 길이가 짧고 수확량도 많았으며 벼 길이가 짧은 만큼 태풍에도 잘 쓰러지지 않았다. 통일벼도 새마을 운동과 참 관련이 많은 품종인데 우리나라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준 품종이었기 때문이다. 통일벼는 주로 땔감용으로 사용했고 내 기억으로는 아마 유신이라는 벼 품종이 새끼줄을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데 많이 사용됐다.

가마니는 보통 가느다란 가마니용 전문 새끼줄을 가마니 기계 틀에 수 가닥 얽어 놓고 기계 틀의 바닥에 위치한 두 개의 발판을 발로 밟아 날줄의 새끼줄이 번갈아 어긋나게 하는 사이에 긴 대나무 자와 같은 날개에 볏짚을 한가닥 씩 꽂아 놓으면 이 것이 쌓여 옷감이 짜이는 듯한 모양새로 가마니가 만들어졌다.

가마니는 얼마나 촘촘하게 엮느냐에 따라 등급과 수매 가격이 달랐다. 가마니를 잘 짜는 젊은 처녀들은 평가도 후하고 며느리감으로 입소문도 자자하게 났다. 대부분은 아주머니들끼리의 경쟁이다. 또 용돈이 궁한 아주머니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라도 더 만들어 아이들 학용품을 사주고 싶은 마음도 많았다.

가마니 짜는 방식은 가마니틀 앞에 앉아 양손에 각각 짚을 한 움큼 쥐고 한 번은 좌에서 우로 한 번은 우에서 좌로 하나씩 하나씩 가마니틀에 매여 있는 새끼줄을 번갈아 앞뒤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그 사이로 짚을 통과 시켜 만든다. 한가닥의 짚이 통과하면 중량감이 있는 바디가 내려와 끼워진 짚을 촘촘하게 눌러준다. 바디는 보통 새끼줄 수만큼의 간격 유지용 철심을 가지고 있고 중량이 있는 나무로 본체를 이루고 있다. 양발이 좀 능해야 한다고 할까 한쪽 발로는 날개를 움직이고 한쪽 발로 바디를 빠르게 움직여야 누구보다 먼저 완성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가마를 짜기 위해서는 이렇게 새끼로 된 날줄과 씨줄 역할을 하는 지푸라기를 번갈아 가며 수 천 번을 보내고 받아야 한다. 아니 수 천 번은 과장일 몰라도 상당한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때 가마니 한 장이 20원이었는지 70원이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평가에 따라 달라지는 수입 때문에 아주머니들의 마음은 늘 불편했다.

가마니 기계 틀에서 가마니 짜는 일이 마무리되면 가마니는 짜는 기계에서 옷감과 같은 긴 직사각의 가마니 원판을 떼어내 옷감의 가장자리를 따라 꿰매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은 옷감의 가장자리가 풀리지 않도록 하는 작업으로 오버록이나 스티치 작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 작업은 기계에서 떼어낸 가마니 판을 넓고 평평한 바닥에 펴고 그 위에 쪼그리고 앉아 가장자리가 풀리지 않도록 여미는 작업이다. 어쩌면 가마니 만드는 과정 중 가장 힘이 덜 드는 작업이라서인지 주로 어린아이들에게 할당을 했다. 지금도 많이 기억에 남는데 이 작업을 하면 검지 손가락 손톱 주변의 피부가 제대로 남아 있질 못한다.

가마니 짜는 작업은 농한기였던 추운 겨울에 많이 이루어졌다. 집 처마 밑에 비닐하우스를 이어 붙여 작업공간을 만들었는데 아마 가마니를 짜는 기계음과 가마니틀의 크기 때문에 적지 않은 외부 공간이 필요했다.

가마니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계를 놓을 공간 이외에도 오버록 작업을 하는 공간도 있어야 했다. 예전의 겨울날은 지금 보다 몇 도는 더 아래로 내려갔고 또 실내에는 별도의 따뜻한 작업공간이 없었으므로 사랑방이나 안방에 군불을 때고 방에서 작업을 많이 했다. 때문에 겨울철 가마니를 만드는 집들은 집안 전체가 온통 지푸라기와 그 부산물이 카오스 같았다.

오버록 작업 후에는 펼쳐진 가마니를 반으로 접고 양쪽 모서리를 서로 붙이는 시접 작업을 한다. 시접은 새끼줄로 꿰매는 데 보통 천장에 달아매고 커다란 쇠바늘을 이용해 꿰맨 다음에야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기계식에 의해 만들어진 가마니는 언제부터 만들게 되었을까? 기록은 1907년 전남 나주에서 일본식 가마니가 처음 제작되었다고 한다. 1909년 조선 통감부가 발행한 제3차 한국 시정 연보에는 1908년 일본의 개량 농기구인 그네 풍구 낫 괭이 따위와 새끼틀 19대 보통 가마니틀 495대 마키노식 가마니틀 50대가 들어왔다고 나온다. 일본 내지의 쌀값 폭등을 빌미로 국내 쌀 반출을 위해 일제가 주도적으로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농촌지역에서는 쌀과 벼를 포장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가마니가 필요했으므로 나일론 포대가 나오기까지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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