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장 막걸리

by 이상훈

양조장 막걸리는 80년대 초까지 시골지역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정부의 관리도 엄격해 면 단위에 1곳만 허가를 했고, 이러다 보니 생산자는 배타적인 독점권을 누렸다. 내가 졸업한 우강면의 내경초등학교의 졸업생들 카페에 있는 관련 글을 참조해 보면 공급독점권을 가졌던 양조장(면단위마다 1개의 양조장 허가가 났음)은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가양주 제조를 단속했는데 평균 보다 판매량이 떨어지는 마을에 대해 세무서에 밀주 신고를 해 자신들의 영업행위를 공고히 했다는 경험자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아침나절에 막걸리 통을 높이 싣고 신작로를 달리는 묵직한 몸체의 짐 자전거가 지나면 길 옆의 코스모스는 눈물을 쏟으며 몸을 휘청인다. 목에 수건을 둘러멘 배달 일꾼의 굳은 다리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페달을 저어 나간다. 출발 전에 간식까지 먹었는데도 밀려오는 공복감은 이 길을 한 번 이상은 더 달려야 하는 고단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우강면에 있는 내경초등학교 졸업생 카페(내경초등학교 20회 쉼터 카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성원양조장")에 올라온 흥미진진한 글 일부를 가져와 본다.

성원리 양조장 [출처 내경초등학교 20회 쉼터 카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성원양조장"]

“그때의 막걸리 판매는 특히 농사철이 제일로 많이 팔렸지. 농사가 기계화가 안된지라 인력으로 모내기하고 낫으로 벼 베기를 할 때라 사람들이 무지 많이 투입을 했잖아!

그 사람들은 서산, 태안 사람들이 주로 와서 모심고 벼를 베고 했는데 그때 막걸리 판매는 평균 20통, 기록은 최고로 26통(한통 : 18리터 한말)까지 팔아본 기억이 있다. 이렇게 한동네서만 판매한 수요가 이러한데 우강면 17 개리(20개 기준*17 = 340통)가 모두 이 정도 팔았다면 그 수요는 가히 짐작이 가고 남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를 혼자 독점을 하였으니 부를 축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러다 보니 성원양조장 창업자 故 유석환 사장님은 우강면 내 모든 초등학교 육성회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지원을 하셨으며 지역유지로 활발한 활동을 하신 걸로 알고 있다. 우리 학교 행사만 있으면 꼭 귀빈으로 초청돼서 단상 위에서 축사와 만세삼창 등을 우렁차게 외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


“또한 막걸리가 판매가 부진한 동네를 세무서에 고발하여 밀주 단속을 나오게끔하여 걸린 집은 무거운 벌금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옛날의 술조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나?

그들이 떴다 하면 온 동네가 술렁이며 무서워 벌벌 떨었다. 기다란 쇠꼬챙이를 들고 다니면서 퇴비장, 잿무덤을 꾹꾹 쑤시며 다니는 그 사람들은 어린 마음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저승사자로 착각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다.”


“ 혹시 모래미-심마니들의 은어로 밥이라는 뜻도 있음-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모래미는 막걸리를 만들기 전 원액으로 농축해 나오는 것인데 모래미 한통에 물 5통을 희석하면 정상적인 막걸 리가 된다고 한다. 판매가 수요를 쫓아가지 못할 때는 물을 많이 희석하여 싱거운 막걸리를 만들어 불만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바쁘면 거기에 물을 더 많이 부어서 싱거운 막걸리를 만들었던 거야”

[출처 내경초등학교 20회 쉼터 카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성원양조장"]




막걸리통 18리터 : 출처 민속나라

여기에 보면 시골 구판장에서 성수기 하루 평균 판매량은 18리터 막걸리 20 통이라고 적고 있다. 양조장마다 구판장 같은 판매망이 있는 마을에 매일 짐자전거로 막걸리를 공급하는 일꾼들이 있는데 , 그 수는 양조장마다 다르겠지만 면단위의 양조장에서 배송을 하는 일꾼들은 대략 6~7명 정도가 평균인 듯하다. 그들의 짐 운반용 자전거에는 대략 18리터 막걸리 통 10개였다. 어린 시절 그들이 자전거에 실었던 모습을 기반으로 정리하자면 짐받이 위에 여덟 개 그리고 짐받이 옆으로 각각 한 개씩 실었다.


막걸리 통 무게는 얼마 정도 일까?

무게로 환산하면 물의 경우에는 무게와 부피가 같다고 보고 18리터는 18킬로그램과 같다. 비중이 다르니 물보다 당연히 무게가 더 나가는 것은 당연지사 일 것이고. 그렇다면 대략 200킬로그램을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것인데 80킬로그램 쌀 두 가마니 반이다.


운반일꾼들의 작업량은 어떨까? 독점적인 공급허가를 가졌음에도 배송 일꾼에 대한 처우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 동네의 경우 양조장으로부터 구판장까지의 거리가 4킬로미터가 넘었다. 평균 20통 많을 때는 26 통이니 하나의 판매장까지 두 차례 왕복을 해야 한다.

하나의 면단위에 대략 17개에서 20개의 판매처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배달원 1인당 담당 판매처는 2곳에서 많게는 3곳이 된다. 한 번에 싣을 수 있는 양을 늘리던지 해야 마땅하다. 하루에 16킬로미터에서 24킬로미터를 달려하고 무게 200킬로그램을 감당해야 한다. 보통 체력이 아니다. 공급자는 판매자의 재고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어쩌면 무조건 판매처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주문량을 조절하던지 책임을 지던지 말이다.


막걸리의 유통환경도 썩 좋지 않았다.

1450년경 궁중 어의 전수의가 지었다는 산가요록(백성들이 삶을 살아가는 필요한 기술)에는 51가지의 술 빚기와 술맛을 변하지 않게 하는 4가지 방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술도가에서 옮겨 담는 과정에서 오염물질 등에 노출되는 것은 물론 작업장 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 발효주의 유통기한을 근본적으로 늘리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막걸리는 신선도가 생명이라서 유통기간을 짧게 가져가야 한다. 성수기인 봄가을 모내기철과 벼 수확기에는 수요가 많았으니 간혹 많은 막걸리를 받더라도 신선도를 유지하며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름이 되면 아침이라 하더라도 뜨거운 태양볕과 싸우며 배달해야 했다. 이동거리가 봄가을과 동일할 수가 없다. 배달 일꾼의 체력소모가 봄가을 보다 훨씬 큰 데다가 같은 배송시간이라 하더라도 발효주인 막걸리의 변질을 무시하기 어렵다. 더구나 냉장시설도 변변치 못해 판매할 수 있는 시간이 크게 줄어든다.

막걸리가 변질되면 막걸리의 상큼함과 똑 쏘는 맛이 사라지고 묵직하고 탁한 변질된 느낌을 갖게 된다.


여름철 유통기한을 넘긴 막걸리 재고는 골칫거리일 수 있다.


아마도 신선도가 쉽게 떨어지는 여름철 구판장 모든 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판매상들은 판매되지 못한 막걸리의 유통기간을 늘리려 많은 방법을 강구했다. 막걸리의 부패나 산화를 막기 위해 각종 편법이 지역 별로 등장했는데 염기성인 수산화물을 넣어 산성화를 막는 방법이 가장 많이 사용됐고 당시에 사회 문제로 뉴스에 등장했던 기억이 있다.


가양주를 담가 먹는 집의 남자들은 양조장 막걸리에 대해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당시에 양조장 막걸리를 드시는 청장년들도 부패를 막기 위해 사용된 수산화물에 대해 그렇게 고민을 많이 안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시골 마을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타지로 이주해 나간 이들 보다 수명이 짧은 이유가 있다.


최근 노인인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당시 양조장 막걸리를 즐겼던 30~40대 청장년들이 2010년 이후 급격히 동네에서 사라져 갔다. 70대 이상의 우리 시골 남성들은 거의 없다. 다만 30~40세 정도의 나이에 도회지로 이사를 간 이들의 생존 소식은 들려온다. 그래서 든 생각이 막걸리 부패방지 첨가물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였다. 생각의 시작은 물론 내가 아니다. 술자리에서 있었던 농담 같은 진담을 배경으로 한다.

양조장 막걸리보다 가양주를 담가 마시게 했다면 시골 남성의 생존율은 더 높지 않았을까!

어쨌든 쌀 공급 안정화를 위해 세무서의 밀주 단속을 이겨내고 가양주를 담그는 집은 지역 토호가의 집안정도는 되어야 했다. 보통의 아버지들은 여름철 한 때 공업용 수산화물을 넣은 막걸리를 마셨을 수도 있었다.

현재 우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타지로 이주하지 않으면서 막걸리를 자주 마셨던 50~60년대 출생 정도의 어르신들은 거의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러한 막걸리 풍속은 2천 년대에 들어서면 급격히 사라졌다. 우리 시골에 있었던 성원리 양조장도 2천 년대에 문을 닫았다. 막걸리는 90년대부터 쇠락의 길을 걷는 것으로 통계에 나오고 있는데 서울신문기사[서울신문 : 2001-09-29, 20 면]에 의하면 전국의 양조장 수는 2001년 3월 말 현재 전국 양조장 수는 996개로 70년대 대한 탁·약주 제조 중앙회에 등록된 회원 양조장 2,481개와 비교하면 엄청난 감소량이다.

기사 내용을 보면 “이농으로 마을마다 빈집이 늘고 품앗이 대신 트랙터나 콤바인이 농사일을 하면서 양조장에 찬바람이 불었다. 논이나 밭둑 새참거리가 막걸리 대신 자장면과 맥주로 대체되는 새로운 풍속도가 자리 잡으면서 양조장 문턱에 먼지가 앉았다. 82년 잘 나가던 양조장을 물려받았던 김동순(金東舜,43, 전남 장흥군 장평면)씨는 "86년을 정점으로 매출이 곤두박질했으며 이후 명맥을 유지하다가 96년 고민 끝에 전업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털어놨다. 그전 주인들은 "70년대 중반까지 하루에 1말(18L) 짜리 막걸리통으로 300여 개를 주문받았다. 장정 7명이 자전거 1대에 막걸리통 10개씩 싣고 다녀야 할 정도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라고 기억했다.”[서울신문 : 2001-09-29 2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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