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지가 그립다

사진은 남해군 웹사이트에 게재된 다랭이 논 사진을 가져온 것입니다.

by 이상훈

버스가 다니는 아스팔트 포장길 옆으로 농수로가 길게 뻗어 있다. 다른 한쪽은 도로를 맞대고 논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평야 가운데 혹은 도로에 면한 곳에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도로에는 농번기에 보면 가을 벼 수확기에도 기름통 등 장비 들이 도로 위에 올라와 있기도 했다.



새털구름하나 없는 아침이다.

조반을 마치고 친구와 자전거로 등교했던 그날도 무엇 하나 부족함을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상쾌한 공기가 코 속을 간지럽게 했던 날이었다. 보통 포장도로에는 아침저녁으로는 30분 단위 그리고 낮 시간에는 1시간 단위로 버스가 지난다. 그 시간만 피하면 버스와 조우할 일도 없어 도로는 늘 한적했다. 어쩌다 등교하는 길에 버스와 마주하게 되더라도 자전거에서 내려 걷거나 갑자기 농수로 빠지게 되는 사고를 면하기 위해 논 쪽 방향으로 자전거를 이동시켜 페달을 밟으면 사고는 없다.


오늘 아침은 마주할 버스조차 없어 도로 한복판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동네를 벗어나 느티나무 한그루와 버스정류장 표시가 있는 둔창(지명) 마을 입구를 지나는데 물이 절반정도 찬 농수로에 경운기 한 대가 엎어져 있다.

별 일이다. 농수로에 경운기가 엎어져 있을 확률히 거의 없기에 말이다.


그날은 정말 몰랐다. 그냥 누군가 운전을 잘못해 농수로에 경운기를 빠뜨려 놓고 귀가를 한 것으로만 이해를 했을 뿐이다. 그랬기에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친구와 어제 TV에서 봤던 스토리를 이야기하며 시시덕거리지 않았나싶다. 그러나 하교해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날 그 경운기에 밑에는 사람이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운기가 농수로에 빠지면서 술에 취한 이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장소를 아침나절 등교 때에는 아무 일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지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또한 사람이구나 싶기도 하다. 알았다면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웃고 장난치고 했던 것이 얼마나 욕먹을 짓인가. 상황에 따라서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참 많은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인다.

삶이란 것이 어쩌면 이렇게 안타깝기도 하고 또한 무례하기도 한 것인가 싶다.


늦가을 밤

기온이 떨어진 그날의 물속은 맑기도 하고 차갑기가 그지없다. 검은색 그 물속은 어쩌면 많은 사연을 닮은 수많은 망자들이 잠시 머무는 연옥이었을까!

그날 죽은 이는 아마 피원(지명)에 있는 도정공장으로 벼 수매를 마무리하고 도정공장 옆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한 잔 걸친다는 것이 밤늦게 까지 이어지면서 달도 없는 그 밤에 경운기 엔진 앞쪽의 희미한 불빛에 의존해 집으로 귀가하다가 사망사고로 이어진 듯싶다. 아마 동네 입구에 다다르면서 동네 길로 들어서기 위해 경운기의 한쪽 브레이크를 잡아 핸들이 급격히 꺾어지면서 갑작스럽게 농수로에 경운기가 뒤집힌 것으로 보인다.

경운기는 참 위험한 운반 수단이다. 운행 안전장치가 갖춰져 있지 않아 동력을 가동할 때에도 손으로 묵직한 회전장치를 돌려 엔진을 구동한다. 요즘이야 모든 것이 버튼식이지만 예전의 발동기 엔진은 대부분 손으로 무지막지한 쇠로 된 회전축을 돌려줘야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몇 해전만 하더라도 소달구지를 끌고 볏섬을 날랐을 것인데 어느 해부터인지 기계화 영농이란 이름으로 경운기 보급이 급격히 늘면서 소가 끌던 달구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만 하더라도 읍내 외곽에는 소나 말의 편자를 박아 주던 집들이 여럿 있었는데 말이다. 아마 달구지를 그냥 이용했더라면 그 이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소의 귀소 본능은 운전하는 이 가 졸던 이랴이랴 소리를 지르던 별 차이 없이 집에 그이를 옮겨 놓았을 것이다.

신작로에 소달구지가 나타나면 내 나이 또래의 소년들은 모두 달려 나가 속도감 없는 달구지 끝부분에 올라타거나 매달리다가 동네에서 멀어지면 뛰어내리곤 했다. 이런 습관은 달구지가 경운기로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과속으로 달리는 경운기에 매달리다가 경운기 주인아저씨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나를 때렸던 그 아저씨의 명분 있는 따귀 날리는 솜씨는 어디서 배웠는지 그렇게 매서울 수가 없다. 그날 밤 아버지로부터도 따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물론 나의 목숨이 위험해 위험을 고지하려고 그랬다는 경운기 주인의 말을 아버지는 곧이곧대로 믿고 나에게 그러하지 말라고 타이르신 기억이 있다. 자기 방어인지 혹은 농사일에서 쌓인 피로감 때문이었는지 지금보면 과잉 대응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그 아저씨는 지금 운명을 달리해 세상에는 계시지 않는다. 전 편 막걸리 글에 게재한 내용데로 막걸리로 인한 사망일 수 있다.

소달구지가 있는 집은 소가 있는 집이었고 外家에도 마찬가지로 그러해 아침저녁으로 사랑방은 방바닥 장판이 검은색으로 쪼그라들 정도로 뜨겁게 여물이 데워졌다. 콩깍지가 들어가는 여물 특히 농사철이면 온갖 소에게 좋다는 것들이 추가되는 데 어쨌든 사람인 나로서는 여물의 익은 콩들이 맛이 있었다. 물론 고구마나 감을 아궁이 넣어 구워 먹기도 했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면 쇠죽 끓이는 가마솥에서 우연히 발견한 익은 콩을 건져 먹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소달구지는 친환경적이다. 경유를 이용한 대부분의 농기계 같이 탄소발생도 있지 않고 송아지라도 낳게되면 가계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 대단위 면적을 소만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데는 힘든 일이지만 경지정리를 하기 어려운 다랭이 논을 경작하는 데는 경운기보다 훨씬 낫기도 하고 안전사고율도 극히 낮다.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다가 사고 나는 일은 달구지에서 바퀴가 빠져버리거나 소의 힘만으로는 가득 짐을 실은 달구지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등이다.

아 참!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어느 날 친구 집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친구 아버지 울며불며 다리를 부여잡고 소와 함께 귀가를 했는데 사연인즉 소의 발에 발등을 밟혀 크게 부어오른 것이다. 소의 무게로 발등이 눌렸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싶다. 아마 당시에는 몰랐는데 골절상을 입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결과론 적으로 농사일의 속도가 빨라지고 다른 부분에서도 빨리빨리 하는 문화가 대세여서 많은 이점도 있지만 기계화되지 않고 “슬로 컬처”가 사회문화가 되었다면 벌어지지 않을 많은 사고들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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