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조카가 소공동 모 백화점에서 게임 캐릭터 관련 전시회를 한다고 지방 모 도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내가 사는 도시의 터미널까지 대견하게 혼자 왔다. 마중을 나온 나에게 안부 인사를 올리고 말을 전하는 솜씨가 중학생 같지가 않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다시 조카를 터미널까지 배웅하고 집에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딸아이를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차에 태워 데리고 갔다 오는데 바람이 차다. 감기 걸린 몸을 이끌고 돌아다녔더니 몸이 더 아픈 듯하다. 요즘 감기가 인후염과 몸살이 동반되어 온다고 하더니 딱 그것과 같다.
관계라는 것이 말 한마디에 달린 듯도 하고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 듯도 하다. 어린 시절에는 모르겠으나 서른 살이 넘어서는 기다리는 게 삶의 80%를 차지하는 것 같다. 가까이는 미팅을 위해 누군가와의 약속을 기다리는것이 있겠고, 인쇄물이 되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허다 못해 결재를 기다리고, 신청한 자동차가 출고되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등 말이다. 기다리는 것의 대부분은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설렘도 있지만 대부분은 긴장속에서 기다리는 것들이 많다.
예전에는 서른 살이 되면 而立이라고 하여 마음이 확고하게 즉 신념이 강하게 굳어져 마음의 동요가 없는 나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다만 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삶을 가장 단순하게 대변해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기도 하고 그러므로 어울리기도 하지만 뜻한 데로 이루어지지 않고 상처를 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사람은 그저 자기 일에 최선을 다 할 뿐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구절도 그러하기에 나온 것 같다.
스스로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당연히 생각한 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뜻한 데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무한히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저런 글이 나왔을까 싶다. 예 선현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무지몽매한 나는 매일매일 노력에 생각한 대로 응답을 받지 못함 스스로를 책망하고 질책하며 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다.
누구나 노력을 한다. 그리고 누구나가 기대를 한다. 그렇기에 모든 이가 다 성과를 원하는 만큼 가져가기는 쉽지 않다.
이것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나는 정작 어느 때 사람 같은 고민을 하였나 싶고,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나 등의 어릴적 고민 등을 쓰려고 한 것 같은데ㅈ말이다.
냉랭해 보이고 한편 무엇을 해낼 것 같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나이다.
이성에 관심이 많았던 시기에 모처럼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서신을 왕래하던 여자 친구의 졸업식에도 가지 못하고 경기도 모 도시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하고 졸업선물을 준비해 가 몇 시간 앉아 있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때야 공중전화가 전부여서 집을 나오면 연락하기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같은 이름의 다른 커피숍이 있었다니...
기다리다가 바람맞은 기분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여자친구와의 사귐이 잘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도 내가 좋아하는 애는 다른 애를 사귀고 있고 내가 별로 관심 없는 애들이 관심을 표해 오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왜 이런 것도 이렇게 잘 맞지가 않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을 했었다.
고등학교시절만 해도 다른 친구들은 바다로 산으로 하물며 동네 인근 계곡으로 놀러 나가곤 했는데(정작 그때는 몰랐다가 최근 동창회 밴드에 올라온 사진 등을 보면 그랬다) 나는 그곳에 없다. 놀 줄 모른다. 웃길 줄도 모른다. 이게 전부였는지 아니면 교과맨 같이 교과서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주 빈약한 아이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실 어쩌다 농담이라도 할라치면 썰렁하다 못해 상대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고 어떤 때는 말싸움이 나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웃길 재주가 없다. 나이가 60 정도 들어가는 요즘에야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 그런 썰렁한 농담으로 잘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웃음을 유발하는 이들이 부럽기만 하다. 그 친구들이 나오지 않으면 모임이 썰렁해질 정도이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나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많은 부분들을 굉장히 섬세하게 살피고 경계했다. 지금에서 보면 그다지 삶에 필요도 없는 부분인데 말이다. 실제 여자 친구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데 폼을 잡고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그런 아이였다. 삶을 무슨 도덕책 대하는 듯 접근하다 보니 사건 사고는 적지만 무척이나 무미건조하다. 누구 그런 삶을 꿈꿀 것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성인 이후의 발전된 모습을 갖으려면 왜 교과서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당시 친구들을 보면 겉만 잔뜩 들어있고 쥐뿔도 없는 이가 말만 번지르르하여 여자친구를 사귄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에 와 보니 그렇게 살아낸 것이 삶의 유머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잘 보이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과 유머, 습관들이 차곡차곡 쌓여 그이의 삶을 재미있게 만든 것 말이다. 삶이 진지하기만 하면 무엇에 도움이 될까? 숨이 막혀 올 것 같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라면 답이 없다. 요즘은 대학 강의도 재미가 있어야 하고 공연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특히 요즘 스마트 폰 시대를 맞아 “틱톡”같은 짧은 동영상은 빠르고 간결한 웃음 코드를 가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사는 내가 과거에 학습한 것이라고는 교과서 읽고 쓰기 반복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도덕적이라는 느낌의 그것이 아닌 그냥 교과서를 친구 삼아 청춘을 보낸 교과맨이지 않나 싶다. 내가 가진 특기가 뭔지를 모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과서가 없었더라도 난 그저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사주팔자를 받아 태어난 인간이 조금씩 다른 것이 더해지기고 하지만 보통은 그것을 모형대로 살아가듯이 유머를 잘한다든지, 음악을 잘한다든지 운동을 잘한다든지와 같은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것과 같을지 모르겠다.
습관은 무섭다.
반복적으로 유머를 가지려고 하면 혹은 그런 환경에 있으면 그렇게 되기도 한다. 정장 그러고 싶었음에도 한 번 그러하지 못했음을 한탄한다.
이제 나를 보자!
나는 무엇을 하는 인간이냐?
무엇이라는 것이 직업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 나는 누구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이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것 그것은 진인사대천명과 같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도 한데 너무 오랜 세월을 기다리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 또한 성급해져 버린 내가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