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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Apr 09. 2024

나는 누구인가

슈퍼 문같이 커다란 달덩이가 지구에 초 근접할 때의 바다는 육지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을 끌어들인다. 모처럼 맞는 바닷물을 육지 입장에서 보면 어떤 기분일까? 원래 바다와 땅은 한 몸이라 그렇게 밀어내고 잡아당기고 할 형편이 아니다 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보일까?

혹은 육지의 많은 것이 바닷물에 휩쓸려가는 상황에서도 그러려니 하는 것이 마땅한 노릇일까? 내 몸의 한 모퉁이가 떨어져 나가도 저들은 언젠가는 우리가 만날 운명이니 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그렇지만 아마도 인간의 입장에서라면 반듯이 이렇게 질문을 하고 정답을 구했을 것 같다. 이와 함께 불편한 것들을 치워 버리거나 혹은 늘 해왔던 데로 민원을 접수시키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성에 찼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모두가 헛 똑똑이라 부르고 참 특별한 사람이구나 하는 등 왜곡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귀하고 아는 체하지 않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세상에 말이다.


자연의 삶에서 보자 하면 달의 중력에 의한 끌어당김은 당연한 것이고 이러한 현상은 매달 발생을 해왔다. 달의 타원형식 공전에 의하면 어느 때는 분명 지구와 아주 근접하는 때가 있고 이때에는 바닷물의 유연성으로 면적이 더 넓어지고 어쩌면 파란색의 바다와 갈색의 육지가 잘 어울려 지내는 듯 보일지도 모르겠다. 육지에 남겨진 소금기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육지 식물과 곤충들의 생애는 갑작스럽게 닥친 쓰나미로 폐허가 되겠지만 말이다.


사람의 경우에는 참 많은 것이 다르다. 바닷물의 범람은 물론 큰 사고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특히 좋은 것과 싫은 것의 구별이 확실하다. 행복한 것과 불행한 것이 있고, 힘든 것과 편안한 것에 대한 기준이 있어서  불편한 것에 대해 신의 형벌 같이 대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반듯하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다. 그러나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양과 음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이중 한쪽만 존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속한 자연은 분명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고 그런 것이 섭리이다. 단지 우리는 그러한 반쪽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만조의 바닷물일 때나  되어야 겨우 물맛을 느끼는 땅은 평소에는 바닷물을 접할 기회가 적어 갯벌 흙에서는 수분이 빠져나가 쩍 갈라진 건조지대의 흙처럼 갈라지고 하얀 소금기를 내뿜는다. 그 땅에는 함초나 칠면초 등의 염생식물들이 군락을 이루는데 가까이 보면 염생식물의 색깔이나 줄기 모양만 그저 그렇게 보다가도 와이드 한 항공사진으로 보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여지는지를 모두가 알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다른 것은 자연을 자연대로 느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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