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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Apr 13. 2024

나이는 숫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 못지않은 기백이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포기하지 말고 남은 인생을 잘 살자 라는 격려의 뜻도 있지만 실제 젊은이만큼의 힘과 기백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역으로 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저는 아직도 어릴 적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고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넓은 공간과 어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아직도 있죠. 지금도 나이만 먹었다 뿐이지 그다지 개선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동굴 같은 곳이나 어두컴컴한 넓은 홀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직도 쉽지 않습니다. 아마 호기심 같은 것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나이 숫자 이런 단어들과 익숙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엔 좀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생각이 들어요. 일도 정말 하기 싫을 때가 많고요. 주변을 보면 자기가 일 하는 것보다 잔소리하는 것을 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본인의 아이디어는 없으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적당히 눙치고 지낼 수도 있으나 많이 답답도 하고 의욕도 기지 않는 요즘입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지속적으로 도전정신을 이어 온 이라면 눈앞의 것들이 설령 아무리 벅찬 난제라 할지라도 도전의식을 가지고 헤쳐 나갈 듯합니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을 같은 일만 해오다가 막상 하는 일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바뀌다 보면 받아들이는 것이 곤혹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다 보니 어느덧 평이해져 버린 일이 되었고 변화가 거의 없는 일정한 패턴의 일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반복해 오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잘 되는 날도 있고 자신의 성과에 흡족해하던 때도 있었던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웬만하면 일은 혼자서 무엇을 창조적으로 해 내고 하는 것들인데 실은 그동안 일터에서 다른 이가 해보지 않았던 것이었지 아마 다른 일터에서는 진행이 됐었던 혹은 습득된 지식을 바탕으로 무난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들 일 수 있어서 그렇게 창조적이다라고 보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그만큼 익숙한  리듬들이 깨져버렸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아주 멀리 떠나고 싶거나 절대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때도 많습니다. 물론 한편에선 자신의 삶에 대해 불성실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하여 꺼려지는 성격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 속에 있습니다. 아울러 장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도 큽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성격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더욱 좌절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명쾌한 자세 변환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요. 남의 문제라면 조언을 이것저것 했을 텐데 정작 본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모습인 것이죠. 앞으로 본인이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아이들간 힘의 격차가 크고 사회통념보다는 힘의 논리가 많이 작용되었었죠. 힘이 우월하게 센 아이들이 지기 딴엔 장난을 험하게 쳤던 일도 많았습니다. 일종의 학폭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올 때 반듯이 건너야 하는 다리를 막고 서서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별의별 험한 짓이 자행되고 아무 생각 없는 아이들도 그 무리에 들어가 동조를 했던 장면도 기억이 납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의 엄석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에는 부모님에게도 말도 못 했는데요. 아마도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들 중 일부는 농어업을 겸한 집 부모의 자식이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덩치도 크고 성격도 환경만큼이나 드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 표현의 80%는 욕으로 표출되었었던 같고, 행태는 과격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화장실은 대부분 밖으로 노출되어 있고, 대변을 보는 곳도 재래식이어서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화장실이 커 무서운 것도 있는데 밖에서도 잠근 장치가 있어 안에서 일을 볼 때 문을 잠그고 도망가는 장난을 칠까 그것도 무서워했던 것 같습니다. 밖에 노출된 소변장소는 소변 냄새는 물론  소금기와 암모니아로 오줌벽이 암갈색과 회색으로 얼룩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지역의 아이들은 그곳에 오줌을 놓고 나서도 바지춤에 자기 물건을 곧바로 넣지 않고 자기 물건을 자랑스레 꺼내 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오줌발 자랑을 해가며 약한 아이들에 오줌발을 난사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때 보면 벌써 음모가 거뭇거뭇하게 자랐던 것을 볼 수 있어서 당혹스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세월을 어떻게 견디었나 싶어요. 체력이 약한 아이들은 덩치가 큰 후배들에게까지 놀림을 당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중학교 때에도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훅을 풀어 제끼고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채 우리를 불러대면 이 또한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여하튼 그런 아이들에게 흠이라도 잡힐까 불안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바닷가에 살던 중학교 1년 선배가 버스에서 내리더니 우리를 부릅니다. 저런 부름은 체벌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단체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길목을 지키고 서서 우리를 불러 세우고 체벌을 합니다. 인사를 안 했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어린 시절 가졌던 이런 공포심도 적지 않은 불안 심리를 갖게 했는데 나이가 들어도 상황 상황마다 두려움이 반복되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요즘이네요.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괴롭히는 크고 작은 불행은

우리를 연마해서 커다란 불행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양성해 주며,

행복하게 된 후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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