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의 바다는 누렇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았을 것만 같은 나이 가끔 아버지와 함께 쪽배에 몸을 싣고 외가를 찾아 나설 때면
선장포구 건너편에서 포구를 향해 뱃사공을 불러야 했다.
배가 뭍에 다을 수 없었으므로 나무판자를 배에서 내려 걸쳐 놓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바지를 걷고 뻘을 몇 걸음 지나야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때는 그 방법이 배에 오르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선착장이 있거나 부유식 접이시설이 있는 요즘의 승선방식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뱃머리에 부딪히던 누런 빛깔의 바닷물색을 보며
바다는 뻘이 전무이고 물은 의례히 그런 빛깔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푸른 동해바다를 보고 감탄을 한 것은 한 참 후였다.
그때는 바다색이 그런 줄 알았다.
오염된 저개발국가의 아이들이 하늘색을 회색으로 알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다 달력에서 본 이국적인 바다색깔에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감정 이입을 하고 비교를 한다.
쪽빛 바다, 쪽빛의 하늘, 쪽빛의 이국 지붕이 유달리 더 빈곤과 부유함을 구분 짓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당연히 황토 빛 바닷물이 모래가 아닌 갯벌 속에서는 넉넉함과 아름다움이 멀다.
그곳애서는 왠지 삶에 대한 치열한 느낌만 가득했다.
그래서 더 가난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날의 하루를 기억해 보면 조개껍질에 발바닥이 베이기도 하고 손톱에 낀 개흙도 잘 빠지지 않았던
처참함이었다.
이제 그곳도 다른 풍경이 되어 간다.
다리가 놓이고 길이 닥이고 물산의 흐름이 번잡해졌다.
변한 만큼의 나의 마음이 가난에서 벗어 낫는지는 모르겠다.
또한 에머럴드빛 풍경에 대한 동경은 아직도 진행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