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야기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도 삼신 할매가 있고 삼성의 별자리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듯이 국민학교 시절을 보낸 합덕에도 많은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많았다. 우선 합덕의 또 다른 지명인 버그내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합덕은 합덕평야라고 불릴 만큼 현재의 합덕성당 인근의 합덕방죽과 함께 넓은 벌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벌은 평야지대를 말하는데 보통 벌’은 ‘들’보다는 넓은 뜻을 담고 있고. 보통은 전답으로 개간되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갯벌이 사진과 같이 개간되기 전에는 물론 아산만의 바닷물이 광활하게 점령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사진의 마을에도 고래원이라는 이름이 있어 많은 고래들이 내방을 하였고, 어린 시절에도 썰물이 나간 다음 뭍에 갖혀 버둥거리는 고래를 본 적도 있다. 이웃 마을 회관에는 고래탑을 만들고 1년에 한 번 정도 제를 올린다고 한다. 그러던 곳들이 삽교천 방조제 공사로 뭍으로 변하면서 고래는 추억에만 존재하게 됐다.
실제로 우강면사무소에 몇 킬로미터를 못 가 예전 경창으로 가던 조세물품을 보관하던 남창이 있었는데 그 바로 앞이 바다여서 조운선이 드나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면양읍지와 대동지지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범근내포 즉 합덕 지역에 35칸의 면천 남창이 있었으며, 이 조세물품 창고를 통해 홍주목과 공주목 소속의 군현세미를 서울로 조운했다고 한다. 그런데 갈수록 퇴적물이 쌓이면서 갯벌 바닥이 높아져 성종 14년인 1483년에는 남창을 아산지역의 공세리 성당이 위치한 공세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 이외에도 특이할 만한 기록도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홍주목(洪州牧) 편에는 "하룻밤 사이에 육지가 함몰하여 바다가 되었다[一日夜地間 陸陷爲海]."라는 기록은 특이할만 하다. 육지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육지로 변화되었음을 추론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하룻밤 사이에 전쟁보다 더한 참상을 겪은 그곳 사람들이 안타깝기에 말이다.
하룻밤 사이에 집체만 한 파도가 쓰나미처럼 덮쳐와 마을을 집어삼켰으니,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듯싶다. 가옥이 전파되고 농경지가 유실 됐을 것은 뻔한 이야기이고, 많은 백성의 시신이 삽교천으로 서해로 떠내려가거나 나뭇가지나 걸려 훼손되고 흙더미에 깔리거나 한 일들은 다반사였겠다. 특히 물에 불어 물에 떠다니는 장면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주변 지역엔 전염병이 돌고 온 산천이 바닷물 피해로 노랗게 말라죽었으리라. 여기에 죽은 이들의 한이 겹쳐 지역 일대가 충격에서 벗어나 제대로 마을 기능을 가질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한다.
시간이 흘러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다음세대가 들어와 살며 돌아가신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제도 많이 열렸을 싶다.
당진 기지시 줄다리기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다 보니 조선 시대 선조 초 아산만에 해일이 일어나고 당진의 한진 일대가 바다에 잠겼으며, 이 일대에 전염병과 호환이 이어지는 등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바닷물 범람으로 유실된 땅이 개간 돼 전부는 아니겠지만 지금의 합덕평야의 일부나 대부분의 우강평야가 바다였다가 육지였다가를 반복한 곳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유독 퇴적물이 많이 쌓여 개인들이 쉽게 제방을 만들 정도로 말이다.
토사가 쌓이면서 자연제방도 생기고 인위적으로 만든 제방도 많아졌다.
합덕과 이웃면인 우강면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범천면(泛川面)’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물에 떠 내려와 형성된 간척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범천면 대포리(大浦里), 독원리(獨元里), 피원리(皮元里), 내경리(內鯨里), 둔창리(屯倉里), 소포리(小浦里), 상원리(上元里), 협원리(峽元里), 상신대리(上新垈里), 성원리(成元里), 노변리(蘆邊里), 이원리(李元里), 황원리(黃元里), 하신대리(下新垈里), 동촌리(東村里), 창리(倉里), 원동(元洞), 남원리(南元里), 북원리(北元里), 원치리(元峙里), 공포리(孔浦里), 상포리(上浦里), 중포리(中浦里), 하포리(下浦里), 송산리(松山里), 은동(隱洞), 홍원리(洪元里), 박원리(朴元里), 정계원리(淨界元里), 세류리(細柳里), 하중방리(下中方里), 점원리(點元里), 범근시리(泛斤市里), 송오지리(松五之里) 등 34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중 상당 수의 자연마을에 제방을 뜻하는 “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도 홍수 때 혹은 만조 때 퇴적물이 쌓여 바다의 기능이 점차 상실되어가고 홍수 때가 아니면 지속적으로 수면 밖으로 노출되어 온갖 바닷풀이 무성한 때에 농민들이 물이 빠진 수초벌판을 따라 둑을 쌓고, 농경지를 만들었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어쨌든 소금밭이기에 염기가 빠져나갈 때까지는 상당한 인내가 요구되는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둑은 만든 이들의 이름이나 집단에 따라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테면 홍원은 홍 씨가 만든 제방이라는 뜻이다.
내가 다녔던 내경초등학교 북쪽으로 독원이나 피원이란 이름의 마을 지명이 있었다.
아산만으로 흘러나가는 삽교천의 크기는 삽교천 방조제가 생기기 훨씬 전엔 더욱 넓은 강폭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은 지금의 한강처럼 바닷물과 민물이 서로 교차했으며, 많은 고래들이 왕래한 기록도 있다.
그 삽교천의 끝머리에 있는 예산군의 구만포에서는 1970년대까지 새우젓이나 소금 등이 거래됐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산만 초입에 있는 한진포구와 우강들녘의 마을마다에는 당연히 포구가 있어 어선뿐 아니고 상당한 크기의 화물선도 통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뱃길을 통해 독일계 유대인 상인이었던 오페르트가 구만포를 통해 들어와 대원군 이하응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진신문에 게재된 지역 유래를 찾아보면 우평포는 당진군 우강면 삽교천변에 있었던 포구로, 소처럼 생긴 두 개의 바위가 바닷가 들판에 있어서 우평이라고 불렀다 한다.
삽교천 연변을 끼고 있는 당진군 우강면(牛江面)의 지명은 이곳에 있었던 우평포(牛坪浦)와 강문포(江門浦)에서 한자씩 따서 만든 합성지명이다라고 쓰고 있다.
한편 남원포(南院浦)는 당진군 우강면 부장리 남원천변에 위치한 옛 포구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정기 여객선이 왕래했다.
신평면과 우강면의 경계를 흐르는 남원천의 남원포다리 밑에 배가 정박하여 주로 신평면민들이 망객산을 넘어와 신흥리를 거쳐 이곳에서 인천을 왕래하였다. 옛날 약 400년 전 남 씨들이 갯둑을 쌓아 마을을 이루었기에 남언(南堰)이 변하여 남원(南院)이 되었고, 남원마을의 포구라 남원포라고 했다 한다.
출처 : 당진신문(http://www.idjnews.kr)
퇴적물이 쌓이기 한 참 전의 아산만의 지천인 삽교천은 지금의 경기도 안성천 보다 규모가 작았나 보다. 합덕엔 합덕이라는 이름 이외에 버그내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는 삽교천이 안성천보다 규모가 다음가는 천이라 해서 불렸다는 설도 있다. 내가 중학교 시절만 해도 곳곳에 버그내 상호를 단 간판들이 즐비했다.
‘버그’는 ‘버근’이 어근으로 이두어로 ‘다음가는’, ‘다음차례’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학언해』에 보면 ‘작은 며느리’를 ‘버근 며느리’라고 쓰고 있기도 하다. 즉 삽교천을 버그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범근내(범근천)의 이두식 표현이다. 충청도의 당진과 경기 평택 사이에 위치한 아산만에서 첫 번째로 큰 하천이 안성천이고,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하천이 삽교천이기에 버근내-버그내로 불렸다는 이야기이다.
지금과 같이 아스팔트나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비나 눈이 내리면 그 땅에 사는 이에게는 그 땅이 다 마를 때까지 형벌과 같이 지독하게 장화신이 요구됐다.
그리고 한진 앞바다의 범람으로 죽은 이들의 검게 변한 피가 스며 다른 지역의 땅보다 더 짙은 흑색이 되었다. 그때 우린 늘 동네 밖을 나가 볼 일이 거의 없어 땅의 색이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