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석양이 뉘엿뉘엿할 때 마당에 아버지가 만든 평상을 가져다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칼국수를 먹던 기억이 납니다. 작은 앞마당에 크지 않은 평상이었어요.
지금 아파트 벽 사이를 타고 흐르는 노을빛과 석양의 명암이 만들어낸 어둠이 담뿍 담긴 두꺼운 구름이 산기슭에 걸치면 구름의 두께만큼 기억은 점점 더 뚜렷해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노을이 다 지기 전 4형제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저녁을 먹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수제비 만드는 작업은 오후 4시 정도부터 반죽을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집에 밀가루 한포와 국수 한포 그리고 삼양라면 한포는 무슨 비상식량처럼 준비되었던 같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는 라면 한 봉 지도 없는데 말이지요.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아마도 저녁 그늘이 길게 잡히고 시원한 바람이 불 때쯤이 되면 어머니는 밥상에 하얀 밀가루를 흩트리고 밀가루를 바른 반죽을 둥그렇게 펼친 다음 다듬이질 방망이로 밀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피자 판처럼 둥글넓적한 원형의 밀가루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밀가루를 한 번 흩뿌려 둥글게 말아 나무 손잡이로 만든 무쇠칼로 채 썰 듯 썰어가십니다. 어쩌면 굻기가 그렇게 일정한지 도대체 어머니는 어디서 저런 기술을 배웠을까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다 그렇게 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과껍질도 잘 깎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된다고 누구나 다 잘하지는 않더라고요.
맛은 정말 있었을까요?
요사이 가정에서는 건강을 생각하여 가급적 천연육수재료로 국물 맛을 내잖아요. 종류도 참 많고 다양하기도 하고요. 그때는 무슨 재료로 국물 맛을 내었는지 싶어요. 멸치 똥을 땄던 것을 기억하면 멸치나 파, 양파정도였을까요. 그래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으니 참 맛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서 사 왔던 것으로 기억나는 것은 물에 타 먹는 오렌지 맛난 가루가 있었습니다. 시원한 물에 타서 환타처럼 마시는 것이었지요. 냉장고가 없었으니 그냥 수돗물에 타서 마시지 않았을까 추측하네요.
그리고 아마도 육수 맛을 냈던 것은 미풍인가 미원인가 하는 브랜드의 MSG를 넣었지 않았을까 싶어요. 칼국수를 한소끔 끓인 다음 그리고 텃밭에 나가 애호박과 고추, 파 등의 등속을 가져다가 송송 썰어 넣으면 칼국수 맛이 한층 풍성 졌지요. 가끔은 감자를 넣어 먹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텃밭에서 공급되는 것이 어떤 식재료였느냐에 따라 칼국수 맛이 크게 달랐던 것 같습니다. 내가 갯벌에 가서 이합을 캐오면 그것으로 육수를 내기도 했고요.
그 당시에는 MSG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어 미원을 한 스푼씩 넣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마트에 가면 볼 수 있는 MSG선전물 보다 더 미원 광고지 상점마다 도배되어 있었고 미원 봉지를 집게가 달린 붉은색의 둥그런 빨래걸이대 모양의 거치대에 집게로 걸어 놓고 광고를 했습니다. 미원봉지를 들고 있는 모델도 그 당시 아마도 유명한 배우였지 싶네요.
마당에서 식사를 했기에 동네에서 밥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다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간 때에 집집마다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굿을 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평소에는 굿판이 벌어지는 마을로 초대되어 한 참 만에 집에 오곤 했는데 당시엔 그 할머니가 그렇게 무섭게 여겨지지도 않았고 그랬습니다. 왜냐고요? 그 무당할머니께서 당신 며느리와 대수롭지 않게 말다툼 비슷한 싸움을 자주 해 그냥 이웃 할머니 느낌이 많았던 탓이기도 합니다. 가끔 마당에서 식사를 할 때면 그 할머니도 저녁을 함께 하곤 했지요. “참 맛나다”하면서 숟가락을 얻는 할머니가 밉거나 이상하지는 않았다는 기억입니다.
참 스스럼없던 시절입니다.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더 얹으면 되는 동네 분 모두가 그냥 식구 같은 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