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훈 Aug 19. 2024

첫사랑


내가 어릴 적 우리 옆집은 친구가 읍내로 이사 간 후 한동안 빈집인 상태로 있었다. 친구가 이사를 가기 전 그 집은 친구의 부모님과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살았었다. 벽은 대부분의 시골집이 그렇듯 흙으로 되어 있고 천장이 높아서 이었는지 집안은 항상 어두컴컴했다는 것과 시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은 없지만 출입문이 두 개였고 나무로 된 출입문 안쪽은 복도처럼 길게 생겼으며, 두 칸의 방이 있었다. 좌우 양쪽으로는 부엌과 창고가 있었다는 기억이고 창고로 쓰이는 곳에는 송판으로 만든 덧창이 있었는데 그 창을 열면 푸른 논이 환하게 보였다. 무기력한 여름날에도 그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지났었다. 창문에 기대어 옥수수를 먹거나 수수깡을 잘근잘근 씹어서 단물을 삼켰던 기억도 어렴풋하다.     

친구 집에는 누나가 둘 있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 누나가 하얀 천을 펼쳐놓고 당시에 유행했던 참빗으로 빗질을 하면 서캐인지 이인지 모를 것들이 두둑하고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작고 시커먼 것이 머릿결 사이에서 떨어져 나왔다. 하얀 천위에 떨어진 그 생명체를 손톱으로 짓누르면 톡 하고 터지는데 정말 묘한 짜릿함이 있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달랜 기억도 난다.      

그 집 부모님들도 대부분 집에 계시지 않아 안방과 윗방으로 오가며 방고래가 무너지도록 우당탕 거리며 노는 일이 참 많았다. 그 친구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형제가 이사를 간 후에는 그렇게 썰렁할 수가 없었다. 학교를 같이 가거나 혹은 집 앞 수로에서 물놀이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었고 누구보다 오랜 친구로 남기로 그렇게 서로 생각도 했고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것은 그냥 어린 시절의 바람 같은 것이었다.

친구가 떠남으로 비어 있는 그 집은 바람이 부는 날엔 덜거덕 거리는 대문 소리로 밤에는 불이 꺼져있음으로 해서 괴괴한 느낌을 풍기게 했다. 비어있는 집은 괜한 공포감을 가져오기도 하고 동네 불량학생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이렇게 큰 차이를 느끼게 했다.


그 집은 몇 차례 주인을 바꾸어 가며 집 모양새를 유지했다.

러한 집에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자애 하나와 몇 살 아래인 남자 동생 둘 그리고 부모가 함께 이사를 와 살았던 적이 있다.

그분들이 깡촌인 이곳까지 이사 오게 된 여유는 몰랐으니 가족 중 여자 애는 참 밝고 명랑했다. 이곳으로 이 살 오게 된 데에는 동내의 누군가와는 친척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고는 비포장도로에 별도의 다른 교통수단도 마땅한 게 없었던 버스만 하루에 고작 일고여덟 대에 불과했던 시골동네가 도시에 이름을 알려졌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기에 도시에 사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연고 없이 시골 동네에 빈집이 있다는 정보를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5학년일 때 그 여자 애는 6학년이었다. 보통 1년 선배가 가장 무섭다고 하는데 내가 우리 교실로 가려면 여자아이 교실을 지나야 했다. 복도를 지나면서 유리창 안으로 슬쩍슬쩍 그 친구가 공부를 하거나 수다를 떠는 모습을 지켜본 기억도 있다. 그 여자 애는 6학년 어느 계절에 그 집에서 이사를 갔다. 아마도 도시의 중학교에 입학시키려면 6학년 겨울방학을 맞기 전일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정황을 분석해 보니 옆집이란 이유로 안다 뿐이지  알고 보낸 것은 수개월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름을 같이 보낸 것은 확실했다. 그 집 부모는 가끔 집을 비우기도 했고 아버지 되시는 분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주 오래 집을 비웠다. 여름철 비 오는 날이면 부모가 집을 비운 그 집은 쓸쓸했을 듯싶다. 그 여자애는 우리 집에 와 같이 완두콩을 까기도 했고, 가끔 내가 보던 소년 중앙 만화책도 빌려갔다.

여자애의 아버지가 비가 오는 날이나 되면 가끔 집에 오기도 했는데 그때는 젊은 청년도 데리고 와서 수로에서 전기로 물고기를 잡았다. 며칠을 머무르는 날이면 어른들이 함께 다리 위에 멍석을 펴고 앉아 세상살이에 대해 넋두리를 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어쨌든 시골에 살면 모두가 시골 아이 같이 된다. 아무리 마음속에 큰 뜻을 가지고 있어도 드러나는 것은 단순하게 시골아이의 모습 그 이상도 아니었다.

한 번은 부모가 모두 집을 비워 어머니에게 여동생을 자기 집에 묵게 해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나도 자 줄 수 있는데 왜 나에게는 요청하지 않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당연히 나보다 한 살 많은 그 아이는 나와 생각이 달라겠지 만 무척 철이 없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부모가 없는 집이 무서우면 남자에게 부탁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얼굴 모양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 웨이브진 머리카락 정도만 기억에 있다.     

작가의 이전글 가을은 아직 먼 곳에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