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미소짓게 하고 따스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물론 시간에도 공간에도 따뜻함은 있습니다.
일주일 이상 한파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것 혹은 생각나게 하는 것은 따뜻한 음식과 따뜻한 공간일 것입니다. 이외에도 몸과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운 이의 미소나 따뜻하게 챙겨주던 마음씨 그리고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머니의 품이 있습니다. 이러한 따스함은 정서적인 발열반응으로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달합니다. 이런 류의 것들은 단지 기억하는 것만으로 냉랭했던 감정이 사라지고 온갖 따뜻한 느낌의 사랑스러운 감정들로 나를 채웁니다. 그렇다고 제게 커다란 정이 쌓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따스한 기억이 그다지 많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그런 따스함은 만들어지고 배움에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타고난 감성이 더 많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연로한 어머니를 제가 안아드리는 일이 많습니다. 어머니도 참 그런 것을 좋아하시는 듯하고요. 손녀인 저의 딸에게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하십니다.
일상에 지치면 피곤함으로 인해 따뜻한 것에도 인색해기도 하지요. 아마 저의 어린 시절이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싶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양푼 대접에 콩나물 비빔밥을 해서 어머니랑 같이 먹었던 기억은 가끔 뭉클한 추억으로 심장을 타격합니다. 심장이 약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유별난 것도 아닌 기억에 뭉클한 감정이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것을 대체할 만한 사건들이 없어서 이겠지요. 또 축제 같았던 초등학교 운동회도 기억에는 남지요. 지금의 제 나이 보다 한참 아래였을 부모님이 밥과 반찬을 준비해 학교 인근에 사시는 고모 댁에서 같이 점심을 나누었던 일도 다른 기억도 선명합니다. 그 외에는 그다지 기억에 없네요. 부모님은 나의 어린 시절 그다지 집에 계신 적이 없었답니다.
따뜻하다는 것과 등가로 대치되는 물건도 많습니다. 핫팩, 난로 등이지요. 그러고 보면 따뜻함은 인간이 만든 것이나 인간의 감정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시간이나 공간에서도 느껴집니다.
겨울철에 노천 온천이 있는 관광지에 가 보면 그런 느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20여 년 전 지인 분이 초상을 당해 지방 소도시에 간 적이 있습니다. 온천 지역이어서 그 지역 호텔 노천온천에서 목욕을 한 적이 있는데 때 마침 하늘에서 눈이 내려 참 황홀한 느낌이었죠. 야외 온천탕에 나가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일단 온천탕 속에 몸을 담그니 금세 몸은 따뜻해지고 차가운 눈이 얼굴과 온천수 위에 내려도 전혀 춥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경험한 것이라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계절적으로 겨울이고 외부 공간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찬 기온을 직접 느껴야 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참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예전엔 지금과 달리 나뭇가지에 혹은 초가지붕 위에 혹은 철이 지나 누렇게 탈색되어 누워 있는 잡초더미 위 등에도 상고대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꼭 눈이 내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지요. 보통은 방학 때인 그런 추운 날에는 아침부터 모자가 달리 점퍼를 입고 벙어리장갑으로 완전 무장을 한 다음 썰매를 들고 농수로에 나가 얼음을 지쳤습니다. 농수로의 얼음은 보통 해가 중천을 지날 때쯤 이면 녹기 시작하는데 폭이 넓고 길게 뻗어 있는 농수로는 얼음이 갈라져 사고도 자주 나곤 했지요. 농수로의 얼음은 가장자리부터 먼저 녹기 시작하는데 가장자리 얼음이 수풀 등으로 얽혀 있기도 하고 얼음 두께도 얇았습니다. 같은 얼음이라도 순수한 얼음과 무언가 섞여 있는 얼음은 강도면 차이가 큽니다. 해가 중천을 지날 때쯤이면 가장자리의 얼음부터 밀도가 낮아지고 녹기 시작하는데요. 그 시간 때부터 오후로 갈수록 빙질도 나빠지고 얼음은 녹아가는 상태입니다.
썰매를 타느라 출출하기도 하지만 노는 재미에 빠지면 사고가 날 확률은 높아집니다.
지구는 자전축의 기울기로 인해 낮과 밤의 길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집니다. 물론 해의 고도도 바뀌고 그로 인해 지구의 위도별로 온도 차이가 발생하고 변화를 보입니다.
겨울철 차가운 아침 공기를 데우기 위해서는 따스함을 품은 아침 해가 창호지 문에 붉은 색칠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궁이에 지핀 불이 아랫목을 따뜻하게 만들 때까지 아이는 창호문 밖의 따뜻한 열기가 보일 때까지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꽤나 진통입니다. 그러다 보면 늦잠을 자기도 하고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기도 하고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아침을 먹어야 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이불속에 있도록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좋은 것만 취할 수는 없다는 논리와 같기도 하지요. 해가 중천을 지날 때쯤이면 어른들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처리하기도 합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저녁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해의 밝음은 보이지 않는 파장으로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달해 줍니다. 오래전 노천온천에서 느꼈던 온천수의 열기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윈드가드 마크가 붙은 옷들이 많은데 예전에는 그런 옷감이 없어 찬바람이 나일론 양발을 신은 발목을 타고 아니면 옷감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살갗이 오돌토돌하게 변화하는 현상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첫 월급의 상징인 붉은색 내복을 입어도 그다지 보온 효과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밖으로 노출된 얼굴과 목 손 등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초등학교 친구 열 명 중 여덟아홉 명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피부연고가 없어 세수를 하려면 손과 얼굴이 아파 닦을 수조차 없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 시절엔 그런 경험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가끔 피가 배어나기까지 했습니다. 그 시절 얼굴에 바르는 크림은 참 부유한 가정에서만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오늘 아침 스마트 폰에 올라오는 마이너스 온도로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것이 힘이 듭니다. 아침 방문을 열자마자 고양이가 뛰어듭니다.
따뜻함을 찾아 들어왔을까요?
아니면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들어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