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를 조금 넘겼을 까
딸아이가 복통과 설사 구토로 힘들다고 전화를 해왔다. 처음엔 아빠를 호출하지는 못하고 "아빠! 새벽에 전화해서 미안해"라며 전화를 끊는다. 데리러 가야하나 하고 옷을 챙겨 입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온다.
밤늦게 공부를 마치고 기숙사 룸메이트끼리 생일축하를 하며, 케이크 한 조각 먹은 것이 화가 되었나 보다.
새벽녘에 본 딸아이는 잠옷차림에 점퍼만 걸친 핼쑥한 얼굴이다. 딸아이 표현으론 폭포수 같이 여러 차례 쏟아냈다고 그래서인지 얼굴이 더 수척해 보인다.
예전 젊은 시절 못 먹는 술을 진탕 마시고 술병이 생겨 밤새 토하고 정신없이 출근해서도 역시나 회사 화장실 변기를 끌어안고 오후까지 지냈던 지난 과거의 고통이 맞물려 떠오르면서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딸아이를 어릴 때부터 진료를 해주고 있는 전문의를 찾았다. 증상을 묻고는 병원 침대 누워보라고 하고 딸아이 복부를 이곳저곳 눌러본다. 충수염 가능성도 언급하며, 많이 아프면 다시 오라 한다. 일단 약을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와 처방약과 먹는 수액을 조금 먹였는데 모두 토하고 만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침대에 돌아누워 꼼짝 않고 있던 딸아이가 자신도 불안했는지 주사용 수액이라도 맞고자 한다.
나도 딸아이의 구토를 줄이고 기력이라도 되찾게 하려면 수액이라도 맞혀야겠다 싶어 집 인근 병원에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링거를 맞기로 했다.
바닥에 개인용 매트가 일정하게 놓여 있는 방으로 안내받고 수액을 손등에 꽂는데 간호사에게 많이 아프냐 하고 묻는 딸아이... 간호사가 어린이용 바늘이라 전혀 아프지 않다 하니 안심하는 눈치다.
간호사가 가장자리만 전등만 남기고 소등해 실내 컴컴함을 조금 면한 상태가 되었다.
불안한 것인지 안정을 찾아가는 것인지 수액을 맞는 과정에서 딸아이가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 한다. 수액이 들어가는 팔이 뻐근한지 좀 아프다는 민원을 넣었더니 간호사 분이 아빠가 팔을 주물러 주면 좋겠다고 하여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고 한 손으로는 팔을 주무르니 엄지와 검지 사이의 근육에 뻐근함이 몰려온다.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겨울철이었는지 군불로 따근따근하게 달아오른 예전 외할머니 집 온돌방에서 할머니가 해주던 옛날이야기와 외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기억났다.
외할머니는 참 자그마하셨다. 그렇지만 자신의 몸보다 두 배는 되는 외할아버지를 꼼짝 못 하게 하시기도 했다. 그런 외할머니가 나에게는 참 다정다감했다.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에게 뭐라 뭐라 하며 쏟아내시면 외할버지는 그 큰 체구로 먼 산만 응시하시고 곰방대를 떨어내시기 바빴다. 코스모스가 피어난 계절이었을까. 아마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지 싶다. 그때 외가댁에 가는 일이 있으면 외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자신의 딸들 즉 이모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양산을 한 손에 들고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포장이 안 된 길을 걸어 작은 이모 댁과 큰 이모 댁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때 그 이모님들은 참 예쁘고 젊었다. 멀리서 온 조카에게 밭에 나가 수박이나 참외를 따다 우물물에 담갔다 주기도 했던 기억도 어렴풋하다.
외할머니의 친정집은 엄마가 시집온 그곳이다. 가끔 사위인 아버지 집으로 놀러 오면 가실 곳이 참 많았다. 사위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자라셨으니 오죽하랴 싶다. 외할머니 집도 외할머니가 시집을 간 집도 그 옛날 우리 집보다 훨씬 큼지막했고 대가족이 모여 살았다. 대청 입구 디딤돌 위에는 대부분 어른들이 내려올 때 넘어지지 않도록 천장에 손잡이를 하나씩 매달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큰 외숙모는 한 번 밥상을 3개 이상 차려야 했다. 정작 외숙모 당신은 겸상을 하지 못하고 부엌에 쪼그려 식사하는 일이 많았고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집들이 밥상을 두 개 이상 차리는 것은 기본이다. 딸린 식구들이 적지 않았기에 말이다.
외할머니와 자던 그 방은 방에 또 다른 방이 붙여 놓은 독특한 구조였다. 별다른 출입구가 없어 그 윗방으로 가려면 할머니가 지내던 방을 지나야 한다. 윗방은 크지는 않았지만 집 바깥으로 방문이 달려 있어, 외할머니만 모른 체하면 다 큰 자식들이 밤마실을 다녀와도 다른 어른들이 알 길이 없는 구조이다. 어린 나의 문제는 온돌방 턱이 너무 높아서 디딤돌이 없으면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았다. 커다란 무쇠 솥과 흙으로 만든 조그마한 부뚜막이 한조를 이루고 지금의 필로티 같은 형식에 지붕과 연계된 외벽으로 본체와 이어진 구조다. 그 방은 독립된 공간이기도 하고 그것으로 인해 안마당은 중정으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면서도 독립되고 한편으론 “식사하세요”가 신속히 전달되는 구조 말이다. 그 독립된 구조의 방에 붙어 있는 무쇠 솥에서는 주로 소여물이 끓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할머니는 매일 아침 이불속에서 화투로 짝을 맞춰가며 운세를 떼셨다. 그런 날 외할머니 옆에 누워 내가 배가 아프다 하면 배를 쓰다듬으시면서 내손은 약속 내손은 약손 하셨고, 가끔 풀밭에 오줌이라도 누면 고추가 시큼하게 아파와 아프다 하면 고추도 만져주곤 했다.
친할머니와는 그런 스킨십의 기억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런 기억이 문득 딸아이를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딸아이가 옆에 누워 있음에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진다. 외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리운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