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은 성원과 피원 마을 그리고 둔창 마을을 거쳐 초등학교를 돌아 내경교회 쪽으로 크게 이어지고 다른 한길은 초등학교 앞으로 해서 구불구불하게 작은 마을길로 우리 마을에 이어졌다. 길옆으로 주택이 끊이지 않았으며, 어느 곳에는 두세 채가 연달아 있기도 하고 어느 길은 친구의 마당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가옥의 구조는 ㅁ자, ㄴ자, ㄷ자가 많았고, 담은 주로 뒤란에 설치한 반면, 대문 쪽으로 담을 둔 집은 거의 없었다. 대문을 사랑채에 붙여지었고, 사랑채에는 밖으로 마루를 내었는데, 이 공간이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공고하게 해 주었다. 또 사랑채 마루에 앉아 있으면 동네를 떠나거나 들어오는 이를 모두 볼 수도 있었다. 지나는 이의 얼굴표정과 옷차림새도 알 수 있고, 시장에 나갔다가 얼큰하게 취한 이의 뒷모습도 아련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들은 주로 마을 안 길을 이용 했다. 굳이 먼 신작로를 이용하는 이들은 주로 바깥 동네 사람들이었다. 하신원 마을 등 갯벌 인근에 사는 이들이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어 비가 내려도 움직이는데 불편함이 없었지만 예전 신작로나 마을 안 길은 토질 자체가 개흙이었다. 그런고로 두 길 다 비만 오면 장화 없이는 못 사는 상황이었다.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는 그나마 형편이 나아 자갈이 깔렸는데, 그럼에도 버스 바퀴가 진창에 빠져 한동안 버스기사의 애를 태우기도 했었다. 신작로에 두텁게 깔아 놓은 자갈은 시간이 지나면서 땅속에 묻히기도 했으나 드문드문 땅 위로 보도블록 같이 형체를 드러내 마을 사람들이 비로 물러진 신작로를 지날 때 진흙 창에 빠지는 것을 그나마 방지해 주었다.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는 마을과 마을마다에 세상이야기를 한가득 전했다. 그 길은 친구의 땀 냄새 같은 푸근함이었고 설렘이었으며 한편으론 고단한 삶을 지탱해 주는 디딤판이었다. 보통 길 위에 선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불투명한 미래를 헤쳐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데 우리가 아는 그 길 끝에는 아마 친구의 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저 길로 들어서면 초등학교 계집애 친구의 집이지 그리고 아마 저 길 위편에는 초가지붕의 ㅁ자 형태의 말썽쟁이 남자애 집이 있었을 것이야.”
그 길은 공식 비공식의 메신저 기능을 했다. 그 길에 광통신이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길을 통해 자전거를 탄 우편배달부가 소식을 전했다. 그 길은 또 지금의 택배 차량과 같이 부모님이 시장을 다녀와 생활용품을 비롯해 아이들의 옷을 등짐이나 봇짐으로 나르는 길이었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면 완행열차를 타고 도회지로 나간 언니나 누님이 선물 보따리를 아니면 전신환으로 돈을 부쳐 오는 길이기도 했다.
삶이 그러하듯 그 길 끝자락에는 슬픔도 함께 했다.
그 길 끝자락 바닷물을 가득 채운 만을 건너오는 배안에는 슬픔 가득한 소식도 있었다. 그날들판은 파란 잎의 보리 싹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회지에서 공부하다가 연탄가스로 사망한 학생 어머니의 서러운 통곡소리가 마음에 울렁울렁하게 남아 있다.
마을 바깥으로 난 신작로를 따라 내려가거나 옆길로 들어가 보면 냇둑말, 상궁원, 하궁원, 상동, 하동 등의 마을이름이 나온다. 특히 “원(堰(언))”이라는 글자가 붙은 마을이 많았다. 독원, 피원, 안고래원, 신원말, 잔디원이 그 예이다. “원”이라는 단어를 품은 마을은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갯벌에 제방을 쌓아서 만들었다는 뜻이다. 평평한 갯벌은 물관리가 편한 논으로 탈바꿈해 많은 이들의 든든한 곳간이 되었다. 물론 다른 시대에는 멀쩡한 논에 바닷물을 대고 염전으로 바꾼 곳도 있었지만 말이다.
동네 단위별로 성씨별로 마을을 만들어 나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새 평야가 된 갯벌에는 사람들이 넘쳐 나고 집집마다에 탈곡한 벼를 가득 쌓아 놓은 창고가 생기고 볏가리가 둥그렇게 지어졌다. 육중한 크기의 발동기가 피대를 돌리며 벼를 찧는 방앗간이 마을마다 거의 하나 꼴로 생겨났다.
탈곡한 벼를 가져오는 이, 쌀을 반출해 가는 양곡상 등 방앗간 앞은 쌓아 놓은 볏단과 쌀가마니를 실어 나르는 대형 화물차로 항상 번잡했는데, 방앗간은 보통 2~3인의 계약직 직원을 두었지 싶다. 시골에는 없던 월급을 받아가면서 말이다. 아마 그 월급은 방앗간답게 쌀가마니로 지급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보통 벼 수확기가 지나면 방앗간의 넓은 창고에는 요즘의 뮤지컬이나 마술을 보여주는 약장사들이 들이닥쳐 며칠을 머물다 돌아가곤 했다.
특히 버스 회차지 즉 버스 종점 마을이었던 내경은 방앗간과 약국, 이발소, 구판장, 정육점 등 후경으로 회차지가 바뀌었는데 종점마다에는 구판장과 전방도 각각 하나씩 있었다. 학교를 끼고 있는 동네에는 약국도 하나 있다. 멀미약, 소화제, 종기 치료약인 이명래 고약 등을 팔았던 약국 주인의 성이 진이라는 성을 갖은 이였다. 마을은 부유한 것 같아도 사회간접시설은 부족해 내가 어렸을 당시만 하더라도 상수배관이 설치되지 않아 많은 이들이 오염된 물을 불가피하게 식수로 사용함으로써 많은 질병을 앓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끔찍한 식수였고, 펌프로 퍼 올린 물 역시 시커멓게 오염된 염도가 있는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