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끼리는 서로 가까워지려고 하기도 하고 거리를 두려고 애쓰기도 한다.
이러한 거리는 감정의 이해득실이나 재산상의 이해득실과 무관한 것은 거의 없다. 이해득실이라고 표현하니 너무 계산적인 것으로 들리기도 하나 실상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도 많지 않다. 너무 정이 많은 이라도 결국 총량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어쩌면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상처를 입어 마음을 닫아버리는데 그 마음의 어느 구석에 있던 연민은 사라지고 배신과 실망감으로 분노가 자리해 그동안 쌓아놨던 마음(정)이라는 것이 파산지경까지 내려앉을 수도 있다.
어쩌면 마음도 마음을 생성시키는 연민과 같은 가엾어하는 마음, 헌신과 같은 지켜주려는 마음 그리고 이를 유지 뒷받침해 주는 체력과 마음의 컬러를 더욱 화려하게 포장해 주는 흠모, 영적 감성 등 다양한 구성요소들의 총합이다. 어쩌면 마음은 시각이나 청각 등 감각으로 들어온 것의 정보와 분석해 내린 정신 안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컴퓨터나 계산기처럼 계측이 가능해 넣고 두드린 것은 아니라서 질량이나 길이가 일정치 않고 순간순간 변화를 겪기도 한다. 일례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비슷한 시기에 몸 안에 들어오면 분석하고 마음의 파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다 다르다. 비슷한 중량이나 길이로 기준표를 만들어 대입하기가 쉽지 않다. 기준표라는 것 역시 사람마다 다 다르기도 하고 말이다.
또 우리 마음은 당장 표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몸 안에 내재해 있지만은 않고 언젠가는 밖으로 표출되어 몸 안의 것과 몸 밖의 것이 “질량보존의 법칙”과 비슷한 모양을 하기도 한다.
어릴 적 숫기가 없어 말을 않던 아이가 성인이 되면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은 말을 쏟아내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살면서 괴롭지 않은 사람이 없고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자 없다. 짐을 나누고 괴로움을 나누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나, 남의 괴로움을 통해 자기의 괴로움을 희석시키려는 생각 또한 없지 않기에 어떤 면에선 나의 괴로움이 타인의 괴로움을 반감시키는 일도 함으로 너무 서러워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굳이 남을 타박하려 하거나 다가서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때가 되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거늘 우리 마음의 조급증은 그것을 견디어 내지 못한다.
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