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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러운 초등시절 기억

by 이상훈

검은 고무줄의 파장이 퍼지면서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울타리 밖으로 밀어낸다. 검정 고무줄은 검은 고무신과도 묘한 어울림이다. 고학년이 될수록 검은 고무신을 신은 애들이 거의 없었다.

왜 그럴까 몇 해 전부터 학생용 운동화가 많이 보급되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비싼 운동화가 아니었지만 운동화의 편안함은 고무신에 비할 데 없이 탁월하고 맵시가 났다. 간혹 구두를 신은 아이들도 있으나 대세는 이름 없는 브랜드의 운동화이다. 발등에 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려있기도 하다. 운동화들은 고무줄을 넘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하며 밟고 지나가기도 한다.

지금 그 시절을 회상해 보면 운동장가의 그 자리는 늘 고정되어 있는 듯한데 주위환경은 봄여름가을겨울로 바뀌어 가는 듯한 착각이 생긴다. 물론 계절에 따라 아이들의 옷차림도 달라진다. 그런데 고무신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등장했다.


짧은 치마나 반바지 긴치마 독고리라는 스웨터 붉은색 멜빵가방 그런 시각적인 것들은 선명한데 학교 수업 활동 외의 것들은 특히 CA활동시간의 것들은 기억조차 없다. 하물며 지금은 그 당시의 교가도 전혀 흐릿하다. 다만 교가 가사에 는 차령산맥이라는 단어는 기억이 선명하다. 산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산맥이라는 단어를 넣는 것이 어색해서였지 싶다. 차령산맥이 어디에 있는지 당시에는 한 번 소개받지 못했다. 들판이었던 우리 동네에서 차령산맥을 가사에 넣었다는 것이 어디 다른 학교 교가를 베껴왔다는 느낌만 들뿐이다.


CA활동은 시간표에 학년이 바뀌어도 늘 들어 있었다. 글짓기 반, 그림 그리기 반, 독서반과 기타로 항상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축구반 정도가 CA활동의 전부이었지 않았을까! 당연히 그냥 추측해 보는 것이다. 시골학교라는 특성상 무엇을 추가로 준비해 가면서 CA활동을 하는 것은 참여율 저조로 CA활동 자체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팬티도 못 입고 다니는 친구가 있을 정도로 시골 경제상황이 힘들었는데 무얼 더 바랄까?


어느 날 체육복 반바지를 안 입고 왔는데 갑자기 반바지를 입고 운동장에 모이라 한다. 반바지가 없는 아이들은 팬티 차림으로 집합하란다. 더욱 기이한 것은 선생님이 속옷을 안 입고 와서 반지를 벗을 수 없다는 아이에게 다가가 바지춤을 열어 보기까지 했다. 아이가 마냥 아이가 아니고 그 아이가 이제 60이 됐는데 그날의 것을 기억하면 정말 치욕스럽기까지 할 듯하다.


한편 들판에 있는 우리 학교 아이들은 밥만큼은 쌀밥을 도시락으로 준비해 왔는데 학교에서는 혼분식을 강조하면서 혼식 검사를 했다. 누군가의 도시락에서 보리밥 몇 알을 빌려 흰쌀밥 위에 얹어야 했던 촌극도 있었다.


출처 nice wayne 블로그 : 네이버 블로그

그때는 왜 또 그리 운동장 조회가 많았는지 학년별로 반별로 두줄로 길게 줄지어선 상태로 30분 이상 뙤약볕에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다만 높다랗게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반향 되며 온 동네에 소리가 퍼져나가는 것은 청각의 기묘한 감성을 느끼게 했다. 지금 같으면 소음 공해니 뭐니 해서 민원이 컸을 텐데 말이다. 조회가 끝나면 우왕좌왕 좁은 출입구로 많은 학생이 몰리지 않도록 학년별로 교실에 입실시켰다.


체육관이 없었으므로 운동장에서 하는 행사가 너무 많았다. CA시간(Club Activity(클럽활동))에도 실외 활동이 많았지만 민방위 훈련이 있는 날이면 비료포대를 가지고 나가 학교 울타리 쪽으로 반별로 산개해 비료포대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북한의 생화학전에 대비한 것이란다. 70년대엔 특히나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나 웅변대회도 수시로 열렸는데 급수시설도 열악한 학교에서 뙤약볕 아래 장시간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어린 나이에 커다란 고역이었다. 빨리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 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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