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이라는 동네를 외곽까지 가 본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면천을 거쳐 서산으로 가는 길에 늘 스쳐 지나가던 곳이었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며 비로소 그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 앞에는 담배나 미원 광고가 덕지덕지 붙은 작은 점방이 하나 있었고, 그 풍경은 1980년대 초반 시골 학교 앞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학교 주변에는 집이 많지 않았고, 가는 길 어딘가에는 말의 편차를 박아주던 곳도 있었다. 농촌과 산업화 이전의 시간이 아직 겹쳐 있던 시절이었다.
합덕 버스정류장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로 한두 정거장 거리였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걸어서 다녔다. 부모님으로 받는 용돈은 한정적이었고 버스비는 한달분으로 고정되어 있었기 추가 지출이 쉽지 않았다. 등하교 시간만 되면 중·고등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 도로가 시끌벅적해졌다. 시골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올라온 내게, 그 무리는 어른처럼 보일 만큼 컸고 낯설었다.
학교 시설은 전반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실이나 건물이 눈에 띄게 바뀌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테니스장만은 몇 차례 보수공사가 있었다. 그 시절 학교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를 은근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초등학교와 달랐던 점은 음악 시간마다 교실을 이동해야 했다는 것, 그리고 체육 시간에는 반드시 체육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는 규칙 정도였다.
입학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길은 어머니에게도 쉽지 않은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검정색 교복에 흰 덧카라를 끼울 수 있도록 맞추고, 모자를 사고, 모자에 달 교표와 카라에 붙일 학교 마크, 학년 마크를 학교 앞 문방구에서 하나씩 사서 끼워 넣었다. 교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국가와 학교가 학생에게 씌운 하나의 제복이었고, 동시에 ‘이제 나는 중학생이다’라는 통과의식 같은 것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던 길에 라디오에서 광주사태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현실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교실 칠판 위에 액자로 담아 넣는 글귀가 정부시책이었고, 선생님들은 부쩍 말을 아꼈다. 머리를 기른 많은 이들이 합덕시내에서도 차량에 실려 나갔다라는 소식을 급우들로부터 듣기도 했었다. 그 전해에는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었고, 어린 마음에도 나라가 정말 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며들었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일상과, 뉴스 속의 격렬한 현실은 묘하게 분리되어 있었지만, 그 공기는 분명 같은 시대의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반배정 시험을 봤다. 이상하게도 초등학교 때보다 성적이 더 잘 나왔다. 그 성적은 이후 3년 내내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시험이라는 틀 안에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볼 수 있겠다’는 조심스러운 자신감이 그때 처음 생겼다. 그것은 야망이라기보다는, 이 세계에서 밀려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안도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다만 밤에만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문제가 있었다.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밤이 되면 가려움 때문에 오래 책상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불편함은 중학교 시절 내내 따라다녔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몸도, 시대도, 그렇게 조금씩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는 실업계로 진학했다. 당시에는 그것도 하나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실업계가 내 삶을 끝까지 이끌어주지는 않았고, 나는 결국 평범한 직장인의 길로 들어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실업계 고등학교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인문계로 진학한 아이들과의 보이지 않는 비교, 전혀 다른 교과 체계는 괜히 나를 위축시켰다. 그 시절의 선택들은 모두 개인의 것이었지만, 동시에 시대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의 선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