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샤를 드 푸코

by 이상훈

성탄이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부활을 준비하는 성가대는 여전히 바쁘다. 성탄과 부활 사이의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유대인들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기도 하는 날이며, 이때 제물로 바쳐진 흠 없는 어린 숫양과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파스카는 해방이고 구원이다. 어린양에 비유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유대인들의 파스카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완성 즉 부활은 가톨릭 교회의 핵심 사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이 날을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이 시기에 판공성사를 실시하고 속죄하고 회개를 하도록 권장한다.
그럼에도 회개를 하여야 할 세상 속의 많은 것들은 점점 더 물욕에 물들어 가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일부 교회와 신자들은 정의를 잃어가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기득권층으로부터 힘없는 이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를 해방시키는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신부님이 강론 중에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산으로 들어가라”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오늘날 파스카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소심한 개인의 일탈을 회개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정의와 평등이 올바르게 실현되도록 교회가 힘써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우리 사회가 비이성적이 되어 가는 것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샤를 드 푸코』라는 신부님이 계시다. 젊은 시절엔 군인이셨다가 사제 서품을 받고 아프리카 빈민을 위해 노력하시다가 반군에 의해 처형된 분 프랑스 분이시다. 군인이었기에 인간이 경험하지 말았어야 할 많은 것들을 보시고 고뇌하셨을까? 이를 통해 사제로 나갈 결심을 하시고 온전히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해방과 구원을 위해 몸을 바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으로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타인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올바른 것인가?
난 오늘 무엇을 배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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