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사람 그리고 마무리

by 이상훈


어떤 인생이든 그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다. 피날레가 멋있는 사람도 있고 스타트가 좋은 사람도 있다. 내가 가끔 동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엘리베이터 먼저 탄다고 목적하는 층까지 빨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삶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남부럽지 않게 자란 아이가 형편없는 어른이 되기도 하고 어렵게 자란 아이가 많은 부를 쌓기도 한다. 부가 인생을 모두 말해 주지는 않지만 부를 쌓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공력이 들어야 하는 것이므로 성공의 범주에 넣어도 틀린 말이 아닐 듯싶다.

앞서 이야기처럼 누구는 돈을 위해서 인생을 걸기도 하고 누구는 하고 싶어 하는 일에 인생을 건다. 그러나 많은 이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삶으로써 그 단계까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다르게 된다. 삶에 목표가 있다는 것은 좋지만 목표를 성취하여도 과정이 부실하거나 비정상적인 경우에는 비정상적인 목표 도달로 오히려 자기를 포장하기에 급급한 경우도 많다.

삶이라는 것은 산다는 의미와 살아낸다는 의미 즉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모두가 담겨 있다. 고로 어차피 살 것이면 능동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쉬움을 덜한 인생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아쉬움이란 도전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기에.

하루를 살아도 열정을 다하고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고단한 삶이더라도 다른 이의 눈엔 전혀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문득 드는 생각은 삶이 하루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면 그다음 하루는 좀 좋아질까? 하는 자기 의심이다.

갓 20대의 나이에 재취로 시집오셔서 이제는 깊게 주름진 살갗이 뼈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고, 귀는 어느 것도 들리지 않는 듯 똑같은 소리를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할머니...

설을 맞아 요양원에 머물고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할머니가 젊으셨을 때부터 좋아하셨다는 강장음료인「구론산」 뚜껑을 열어 드렸는데 좀 전에 과일을 많이 드셨다며 드시기를 사양하시기에 옆에 놓아드렸는데 그것이 넘어져 이불을 적신다. 할머니는 정신이 혼란함에도 불구하고 연신 수건으로 이불자락과 방바닥을 훔치신다. 이런 일도 습관이시구나. 깔끔함을 유지하는 것 말이다. 손과 팔로 이어지는 골격과 양다리는 앙상하다는 말로 형상을 다 설명할 수 없는 거동이 가능한가 할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할머니, 몇 해 전 작은댁에서 뵐 때만 하더라도 이러시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육신은 매일매일 기능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그나마 희미한 기억을 붙들고 며느리의 형상을 확인하신 듯 말씀을 하신다.
어쩌면 오늘이 어머니가 할머니를 뵙게 되는 마지막 날 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진다.

할머니 연세가 104세이시니 나와는 50의 차이 난다. 내가 일곱이나 여덟의 쯤의 나이에 할머니의 연세는 마찬가지로 50을 더하면 56세나 57세쯤이었을 게다. 그 당시의 할머니 집은 시장 쪽으로 난 4~6개의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달리고 함석으로 된 보호 덮개가 저녁마다 닫혀 있는 점포를 겸하고 있었다. 점포는 항상 향긋한 냄새가 배어 있는 사과 상자가 가득했다. 지하실과 그 위쪽으로 낸 다락방에도 역시 사과상자로 빼곡했다. 할머니는 그전부터 계속해서 사과를 판매하셨던 것 같다.

큰 고모님 연세가 83세이고 보면 할아버지에게 시집오신 것은 대략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로 맞으신 할머니 셨기에 내가 어렸을 적부터 똑같은 할머니의 느낌이었기에 지금까지 할머니가 몇 살에 시집을 오셨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처음으로 노인이 된 할머니의 며느리인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오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돌아보았다.

아버지의 계모셨고 작은 아버지의 친모이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가계가 곤궁해질 무렵부터 사과 장사를 하신 듯하다. 그 세월이 대략 70년이다. 젊은 나이에 시집을 와서 한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두었으니 자식을 키우면서 생겼을 어려움과 갈등 그리고 전처의 자식들과의 소통이나 자식들 간의 밸런스 유지도 시각에 따라 달리 볼 수 있지만 여자인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인고의 세월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결과는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함을 가져오기 위해 당신 나름으로는 노력을 적지 않게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승에 대한 기억이 썰물 빠져나가듯 훵해진 기억 속에서 갯고랑에 고인 약간의 바닷물 같은 기억을 퍼 올리신 듯 요양원 출입문을 벗어나려는 우리를 배웅하려 거쳐하고 계신 방에서 힘겹게 밖으로 나오신 할머니... 옛 추억을 찾으려 애쓰는 눈빛과 느릿하게 이어지는 몸놀림 사이에는 슬픔 같은 그리움이 보인다.

자식들조차 인생의 황혼기를 맞고 있는 지금 할머니가 보낸 세월 안에서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