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평야지대에 고요가 찾아오고 달이 휘영청 솟아오르면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물길마다 짚불이 피어오른다.
쥐불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은 마을과 마을의 경계이다. 주로 농사용 물길이 흐르는 수로를 사이에 두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다리가 경계를 이어주는 곳이다. 수로가 깊고 온갖 잡다한 쓰레기들이 버려져 있어 감히 다리를 지나지 않고는 건너기도 힘든 곳이다. 비무장지대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우세한 수를 앞세워 다리를 선점하면 승리를 만끽할 수 있는데 그 승리라는 느낌이 지난 시절 타 동네를 건너다 당한 치욕의 한풀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쥐불놀이 중에는 상대방의 공격이 지나치게 위험하기도 했다. 때문에 피아간에 콘크리트 다리의 중간에서 더 이상 나아가기를 꺼려했다.
쥐불놀이는 대단한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밤중에 갑자기 벌어지기도 하고 낮부터 콩 그루터기 등 쥐불놀이 재료를 준비하기도 한다. 쥐불놀이가 급작스럽게 벌어지는 경우는 주로 옆 동네 아이들의 쥐불놀이를 목도하면서부터인데 이때는 주로 수성에 방점이 있다. 이 때는 쥐불놀이의 도구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논두렁에 있는 짚더미에서 짚단을 가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우고 불을 놓는다. 수성이 목적이기에 옆동네 아이들이 자기 동네로 침입하여 논두렁에 쌓아 놓은 짚단에 불을 놓고 도망가는 것을 막으면 그뿐이었다.
쥐불놀이를 할 때 준비되는 재료는 앞서 이야기 한 콩 그루터기 등 발화가 쉽고 불꽃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소재가 좋았다. 콩 그루터기는 논두렁 주변 둑에서 흔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또 병참기지와 같이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콩 그루터기를 군데군데 수북이 모아두었으며, 불에 타기 쉬운 비닐이나 나일론 소재도 함께 준비했다.
쥐불놀이에 쓰이는 깡통은 꽁치 통조림 깡통에 못과 망치로 구멍을 숭숭 뚫어 공기가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해 주고 어른 팔 길이의 철사를 동여매면 끝이다.
본격적인 쥐불놀이를 위해 동네의 경계선 인근에 집결하는데 무엇보다 경계선에 다다르기 전에 쥐불놀이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수를 적당히 확보해 놓는 것이 필요했다. 특히 중요한 아이가 나오지 않으면 일부러 찾아 나서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상황의 경우 집안에 갇혀 있는 아이의 엄마에게 찾으러 간 아이가 혼쭐이 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마을과 마을의 경계선인 수로로부터 대략 논 2-3구간 정도의 거리부터 깡통에 콩 그루터기 등을 넣고 불이 잘 붙을만한 비닐과 마른 갈대 꽃잎 등으로 발화를 시켜 허공에 빙글아니 팽~ 하고 돌리기 시작하는데 깡통에 뚫린 구멍에서 엄청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구멍 밖으로 화염을 뿜어 냈다.
또 상대방이 있는 쥐불놀이의 경우 몇 개의 깡통이 허공을 돌고 있는지 몇 개의 횃불이 서 있는지가 수적 우위를 판가름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되기 때문에 일부러 볏짚 단을 쥐불놀이에 나온 아이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게 세워 놓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어느 해 늦은 저녁이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이 방학을 하기 전이었는데 그날은 해가 지기도 전에 초등학교 고학년 형님들을 중심으로 쥐불놀이가 벌어졌고 사람의 형체가 분명하게 구분되었으므로 컴컴한 밤처럼 짚단의 횃불 수가 아니라 직접 참여한 사람의 숫자로 승패가 갈리는 날이었다. 타 동네에 비하여 숫적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혹은 동생들이 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로 중 고등학교에서 돌아온 형들까지 계속해서 끼어드는 바람에 거의 동네 모든 아이들이 논둑 위를 가득히 메웠다.
이런 동네 간의 패싸움에는 각목이나 나뭇가지 등 다양한 것들이 동원되기도 하여 서로 간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학교에 가면 다들 급우이거나 선후배이거나 했는데 동네로 나뉘면 어디서 생겨난 적대감인지 필요 이상으로 흥분을 했다. 같은 학교도 이 정도이니 학교가 달랐을 경우에는 정도가 더 심했다. 그날의 싸움은 어른들의 개입으로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되었다.
쥐불놀이가 아니더라도 겨울철에는 빈 공터가 많아 아이들의 불장난이 낮이고 밤이 고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낮에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수로 주변에서 콩꼬투리나 그루터기 등을 모아 태웠다.
그러다가 옷이나 양말 간혹은 비싼 운동화에도 흠집을 냈는데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전 집에 돌아온 경우는 다행지만 밥때가 되어 목불인견 상황의 아이를 보게 되면 부모님의 매타작도 다반사로 벌어지곤 했다.
낮에 불장난을 하고 온 가족이 저녁밥상에 둘러앉으면 방안은 불내음으로 진동을 했다. 얼굴과 손등은 찬바람에 갈래갈래 거북 등처럼 터져있고 일부는 동상을 입었는지 발그레했다.
형들을 쫓아 논밭을 헤매며 콩 그루터기를 모으고 볏짚을 나르고 전투를 기다리는 병사 같이 수로 옆으로 볏짚을 깔고 앉아 본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들떠 있던 시절, 그 시절의 그 기억이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겠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허용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은 것에 비하면 스스로 판단하고 협력하고 수행해 나가는 방법들을 체득했던 것 같다.
쥐불놀이의 형태가 위와 같다면 성격적 측면에서의 쥐불놀이는 우물 밖을 벗어나 보지 못했던 지역중심의 인간관계와 사고방식이 극렬한 지역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느 분의 글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차와 버스를 타본 일이 없다. 기껏해야 동구 밖에 나가본 것이 전부였다.”라는 것이 있고 보면 내 동네에 대한 지나친 편애가 극단으로 흘렀던 것일 수도 있다. 연장선상에서 보면 세계화의 보편성이나 인종차별 등도 쥐불놀이에 나타난 동네 간의 다툼과 비슷한 의식구조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당시엔 동네마다 텃세가 심했고 타 동네를 지나가려 하면 의례히 몇 대는 맞아야 지나는 때였다. 이것이 갈등의 씨앗을 잉태시켰고 그것을 경험한 이들이 내적인 단결을 유도한 후 광적인 표출로 이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기에 말이다.
쥐불놀이가 주었던 재미와 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꾸중 들이 저마다 다른 추억을 남겼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 아이들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간섭으로 많은 것이 제지되고 이로 인한 욕구불만이 세상을 향해 폭발하듯 발현되어 사회문제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이들에게 쥐불놀이는 아니지만 정상적으로 욕구불만을 해소하고 세상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역할을 다 해 나갈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