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남자의 이야기이고 승리한 자의 이야기다 라고 말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말이다.
힘있는 자에 의하여 쓰여진 양식화 된 역사는 개인의 삶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시대적 배경이 된 철학이나 종교들로 각색되고 윤색되어 진실을 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역사의 물줄기가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4.19 혁명 같이 밑에서 발원하여 승리한 정도의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통상의 역사는 개인의 삶을 다 담아내지도 못한다. 그럴 수도 없고 통일된 원칙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무엇을 쓰든 정확한 팩트를 발판으로 서술되어야 마땅하다.
서술자에 따라 숲을 그리기도 하고 숲속의 나무를 그리기도 하지만 무엇이 됐든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팩트가 기반되어야 슬픈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내 삶이 불량이다 하여 다른 이의 삶을 꾸어다 채울 수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삶을 날것 그대로 간직해 가는 것이 역사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혹은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는 많이 다르다. 이것이 개인의 역사를 소외시키고 열등감을 증폭시킨다.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자. 이를 테면 그리스도교 같은 경우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과정이나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박해에서 벗어나는 과정도 인위적이다. 로마제국은 원래 다양한 문화와 종교들이 넘쳐났던 곳이었다. 그리스도교도 다양한 종교 중의 하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당시 로마제국의 쇠퇴가 잘못된 종교를 믿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고 248년에 있었던 로마제국 창건 1천 주년 기념식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로마 황실의 미움으로 상당한 박해를 받던 중에 황제 지위를 찬탈하고자 했던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세력이 필요했던 콘스탄티누스에게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그리스도 신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조언을 했는데 마침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꿈에서 가르침을 받고 병사들의 방패에 고리가 달린 십자 모양을 그리게 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한 그리스도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 터기 이집트 아르메니아 지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인으로 또 갈리아, 에스파냐, 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 북부 유럽의 브리타니아까지 세력을 넓히게 된다. 확장으로 인한 자신감은 타 종교의 구성 양식을 받아들여 체화하는데도 망설임이 없게 되었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필요성이 증가하거나 주변 종교와 비교하여 체계화되지 못한 점을 보완하고자 한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도 초대교회 때에는 유대교와의 차이 점이 크지 않았다. 민족종교의 범주안에 머무르지 않기 위한 글로벌한 성서 이해나 그러한 하느님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세력이 약했던 초대교회에서는 막강한 이웃종교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정통성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로마 정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급속한 성장을 한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이교의 관습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시리아 지역에서 등장하고 병사들이 믿었던 미트라교의 축일인 12월 25일을 예수 탄신일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공현이라는 것도 원래는 이교의 신이 숭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국가를 건설하면서 하늘의 뜻임을 설파하는 용비어천가 등을 짓게 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 나에게도 나름 꿈을 키우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면 하는 때가 있었다. 나름 성공한 이에 대하여 고작 그 정도인가 하며 코웃음을 치던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이후 면단위의 아이들이 모였을 중학교나 도 단위 정도의 아이들이 모였을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순위가 낮아지고 뭐 하나 뜻대로 이뤄지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아이들을 키워내고 한다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할 때에야 비로소 삶이란 것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구나 인정하게 된다.
딸아이가 읽던 책에서 나온 내용을 일부 인용해 본다면 미술학원 강사인 해원이 “그림이나 글 같은 건 가르치는 게 아닌 거 같아. 재능이 있는 사람은 굳이 가르쳐줄 필요가 없고, 그렇지 않다면 가르쳐봐야 소용이 없고.”라는 문장이다. 실제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도 없는 것들이다. 학원 강사를 하면서 경험하게 된 많은 사건들을 단순화해 묘사한 것인데 나에게는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을 하든 쉽지 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가 올바르 쓰여야 후세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듯이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곤혹스럽다면 그것을 덜 발생시켜야 하겠고 어쩌면 주변 시선이 부담스럽다 하더라도 괘념치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것도 개인의 역사를 사실에 주안점을 두면서 새로운 방식의 역사를 서술해 가는 길 일 수도 있다.
오늘 딸아이의 책(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이도우 저, 시공사)을 읽으면서 내 생각을 좀 더 구체화했다고나 할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저 좋은 인생이란 것이다.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이고 예전 어른들이 하시 던 말씀이었다. 고민만 크게 하는 것 보다 전체적인 것에 방점을 두고 소소하고 불안한 것들을 무시하며 사는 것도 개인적으론 나쁘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