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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ized Mar 19. 2018

쪼리

아직도 널 신으면 마음이 놓여


쿠쿵.. 콰광.. 꽝! 눈을 뜨니 이슬이 창문에 맺혀있다. 어둑어둑한 빛이 새벽을 비추기 시작하고 매일 새벽 7시 쓰레기 수거차량은 누군가의 아침을 깨우려는 듯 분주하다.  어젯 밤 잠에 들기 전 배가 고파 햄버거를 먹을까 말까 백번 고민했지만 늘어나는 아랫 뱃살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잠을 청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이런 나의 식욕은 지금 온데간데없다. 아침 식사에 대한 나의 욕망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싶다. 학교를 가야 하는데.. 4학년이 되고 나선 오전 수업을 가본 적이 없다. 수업시간에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나나 하나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선다. 신발장 앞에 서서 잠시 고민을 한다. "뭘 신지..?" 그러나 고민의 끝은 항상 똑같다. 오늘도 난 쪼리를 신고 학교에 간다.


몇 개월 전 무심코 지나가던 신발가게 앞에서 할인 중이던 이 쪼리를 처음 마주했다. 처음 보는 브랜드였지만 신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발을 포근히 받아주던 느낌에 나는 결국 한 치수나 컸던 이 쪼리를 나의 발 동무로 맞이했다. 그저 온전히 나에게 푹신함 그 자체였다.


쾌청한 날씨, 습기 없는 맑은 공기, 그리고 시원한 바람. 그저 여기가 천국일까 싶은 캘리포니아 기후 속에 나는 늘 그래 왔듯 푹신하고 포근한 이 쪼리를 신고 학교에 간다.


학교 가는 길에 바나나를 먹으며 운전을 하다 문득 뇌리에 스친다. 왜 그저 이 쪼리만 한 인연은 없는 걸까? 그저 인간은 관계 속에서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인 존재가 되어간다. 이것은 연인관계라면 더욱 농후해진다.  첫눈에 이끌려 몇 마디 나눠보고, 부질없는 사실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 우연을 가장하고 결국 인연으로 착각한다.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맞춰주리라 내뱉었던 가식적인 말들은 곧 헐벗겨져 왜 넌 이런 사소한 것 마저 날 위해주지 않냐는 말로 초심을 짓밟는다. 그리곤 각자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더 중요시되고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그저 최악의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곤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넌 정말 이기적이야, 이젠 다 필요 없어."


마치 내가 마음에 쏙 들어 샀던 신발을 신고 다니다 발이 아프면 신발 탓을 하는 셈이다. 처음 보았을 땐 그저 인생의 최애템으로 여기며 애지중지했던 예쁜 신발을 왜 내 발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발을 미워하는가. 나는 늘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신발을 신으려면 아픈 부위가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세상 그 어떤 신발도 내 발에 딱 맞춰 나오는 신발은 없기 때문이다. 발이 아프면 내가 반창고를 붙이고 두꺼운 양말을 신으면 한결 나아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연인관계에서도 상처를 주고받는 건 당연한 처사이다. 내가 상처를 받은 만큼 나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만 인지하게 된다면 내 상처가 그리 아프진 않을 것이다. 혹여나 깊이 파인 상처가 있다면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지키는 법 또한 깨달아야 한다. "분명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을 거야, 남 모를 이유가 있으니까 그랬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혼잣말을 뱉으며 밖에 나가 한참을 걷다 보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녹슨 마음의 자물쇠도 어느 순간 스르륵 풀리게 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느끼게 된다. 내 발에 딱 맞게 늘어난, 그래서 이젠 더는 아픈 부위가 계속해서 아프지 않은 신발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아픔만 주는 신발이라면 그때 가서 당장 버려도 충분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 다치고 상처받는 것을 결코 인내하지 못한다. 누군가 관계를 지혜롭게 이끌어 나가려 해도 상대방이 온전히 같이 노력해주지 못하면 그저 내 상처도 나 스스로 위로해야 하며 심지어 상대방의 상처까지도 챙겨야 하는 참혹한 사태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결론은 내 상처보다 상대방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던 그 사람은 결국 이별통보를 받는다. 왜? 상대방은 그냥 안 맞는 신발이 불편해서. 더는 못 신겠어서. 서로가 더 힘들고 더 서운하다고 생각한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이것이 내가 느낀 연인관계의 한계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너무도 잘 알기에 나는 내가 신고 있는 쪼리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진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싶지도 주고 싶지도 않았으니..


이런 심란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 고맙게도 내가 지금 신고 있는 이 쪼리는 처음부터 푹신하게 날 받아주었고 또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오히려 많이 신어서 그런지 내 발모양대로 쪼리 위에 자국이 나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 건 아닐까. 이것이 내 신발장 안 그 어떤 신발들 보다도 내가 이 쪼리를 애틋해하고 애착하고 애용하는 이유다.


그저 내가 신발을 사러 백화점에 가서 고르기보단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길 우연히 만났던,  화려하고 값비싼 로고 덕에 나를 빛내주진 않아도 늘 포근히 말없이 아픔 없이 감싸주었던 나의 쪼리는 오늘도 나를 위로한다.


아직까진 밤이 되면 창문 넘어 불어오는 찬 밤공기에 나 홀로 잠을 청하지만 두 손 꼭 잡고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하며 작은 웃음 하나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나의 쪼리 같은 당신을 오늘도 나는 밤하늘에 형상화시키며 그리워한다. 그저 나를 자신이 찾던 화려한 신발인지 아닌지 이리 신어보고 저리 신어보는 허망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존재가 당신에겐 쪼리 같은, 그저 내게도 쪼리 같은 당신을 오늘도 존재 없는 기다림 속에 그리워한다.



아직도 널 신으면 마음이 놓여

지금부터 널 마주하게 될 생각에 마음이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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