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지나 조용히 뿌리내리는 마음에 대하여
바쁘지 않은 날이 오히려 어색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했고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를 자꾸 다그치게 되었습니다.
몸은 쉬고 있어도 머릿속은 멈추지 않았고 그 끝엔 늘 이대로 괜찮은지에 대한 의심이 따라붙곤 했습니다.
그 불안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라온 것이었습니다.
대가족처럼 지내던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 일들을 겪다보니 어느새 눈치를 보고 말보다 표정을 먼저 살폈습니다.
가까워야 할 사람들에게서 받은 말 없는 상처는 조용히 제 안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억이 아픔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닙니다.
좋았던 장면들을 꺼내 보며 괜찮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고 그렇게 애써 괜찮은 사람처럼 지내왔지만 결국 저는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조용한 위험 신호를 알아봐 준 어른이 있었습니다.
그의 안내로 그곳에서 제 마음의 모양을 처음으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불안장애, 우울증, 공황장애, 착한 아이 증후군…….
차마 쓰지 못한 진단명까지 바라보는데 진단명까지 안쓰럽게 느껴질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그 모든 진단명은 저를 잠시 멈추게 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첫걸음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누구에도 아프다는 말을 꺼내진 않았습니다.
그 중 공황장애는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한했습니다.
3년 가까이 지하철을 타지 못했고 사람 많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하얘졌습니다.
그런데도 괜찮다는 말로 제 상태를 부정하며 스스로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시간들을 지나야 했습니다.
몇 년 동안, 선생님은 제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고 구체적인 해결방안까지 알려주셨지만 제 자신이 만족할 만한 현실적인 방안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꼭 가져야 했기에 그 무렵부터 저는 회복과 치유를 키워드로 가진 인문학책을 더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책은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였고 어떤 문장은 제가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조심스레 꺼내 주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위로받고 글을 쓰며 감정을 정리했습니다.
글을 쓸수록 저는 제 자신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 시간들이 결국 시들었던 제게 조금씩, 조금씩 물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고요한 하루가 찾아왔습니다.
해야 할 일이 없는 날, 시간이 특별하지 않은 날, 그런 날이 처음으로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햇살이 천천히 바닥을 옮기고 바람이 잠깐 머물다 조용히 사라지고 책 옆에 놓인 찬 커피잔에 맺혔던 물방울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증발해 있던 그 순간들 속에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겉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저는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것을요.
고요는 멈춤이 아닙니다.
그것은 깊어짐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지금 당신이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건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향해 가는 중이 아니라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말하는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가지 않아도 지금의 고요가 당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걸 저 역시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니까요.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도 자라고 있어요.
고요한 날들이 다만 그것을 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알려주고 있을 뿐이니까요.
당신에게도 그런 고요한 날들이 있었나요?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자라고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