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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쓴 당신에게

열린 결말 틈으로 <더 폴>이 보내는 위로

by 강신정 Mar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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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개봉한 <더 폴: 디렉터스 컷> 버전을 관람했습니다.


삶은 아름답지만 자주 무책임하게 다가온다. 시작하기를 선택한 적도 없는 이 생을 오롯이 이끌어야 한다. 버거운 와중에 절망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어깨가 무거워 주저앉고 있자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모든 희망으로부터 낙하해 절망뿐인 상황에도 인간은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린다. 삶은 소중하니 뭐가 됐든 살아야 한다고 수군거린다. 이 세상에는 말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런 점에서 <더 폴>은 다르다. <더 폴>은 듣는다. 무책임한 교훈은 저 멀리 던져둔 채로 두 인물이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길 기다린다. 인물은 살아있고 영화는 잠시 비켜선다. 거리감을 지켜주는 영화는 얼마나 소중한가. 그 고요 안에서 나는 어떠한 부담도 짊어질 필요 없이 그저 듣기만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두 인물, 리오와 알렉산드리아는 닮았다. 둘은 어느 한 곳에 완전히 포함되지도 완전히 배제되지도 못한 채 경계 위에 비스듬히 걸쳐 있다. 먼저 리오는 누군가의 대역으로 존재하는 스턴트맨이다. 영화들의 스크린 내에 분명히 등장하지만 그를 리오로 인식할 수 있는 요소들은 철저히 가려진다. 알렉산드리아는 어른들의 품에서 보호받는 동시에 그들의 영역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기를 요구받는다. 순수함이 오염되지 않도록 성역화되는 탓이다. 일정 영역에서 일정 방식으로만 존재하기를 허락받는 어린아이의 특성은 스턴트맨 못지않게 모순적이다. 희생당한 노동자로서 ‘낙하’한 탓에 병원에 존재한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리오는 스튜디오 측의 과한 요구로 말에서 추락해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나이에 비해 위험한 일을 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


그러니까 둘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 낙하해 본 사람들. 이 닮음의 요소는 완충재가 되어 내 귀에 안착한다. ‘성인 남성과 그를 살려내는 어린 여자아이’라는, 조금은 지긋지긋한 관계성에 귀를 닫아버리고도 싶지만 그 마음을 이기게 해준다. 그들의 이야기가 어지러운 소음으로 들리지 않도록 해주는 안전장치를 낀 채, 나는 스크린에 귀를 기울인다. 두 인물의 목소리가 하나의 목소리로 들리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첫 장은 리오가 펼친다. 리오의 이야기는 ‘삶’ 그 자체이다. 가장 강렬한 색감, 가장 웅장한 음향, 가장 역동적인 카메라. 살아있는 이야기가 화면에 생생히 그려진다. 그에 반해 어두컴컴하고 단조로워 절망이 포자처럼 퍼지는 듯한 리오의 잿빛 병실. 이야기가 환하게 그려질수록 병실로 카메라가 복귀할 때마다 더욱 캄캄하게 드리우는 그림자. 그만큼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영화관. 그 대비에 괜히 내 얼굴의 음영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만 같은 조마조마함.


환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낙차는 항상 우리를 발가벗긴다. 그 수치스러움을 안다. 알면서도 무작정 삶을 종용하기란 어렵다. 낙차를 견디지 못한 리오가 이야기를 끝내버리려 할 때도, 알렉산드리아의 손을 빌려 자살을 시도할 때도 마냥 그러지 말라고 소리칠 수 없다.


무력한 관객이 되어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리오를 멈춰주는 건 또 다른 리오인 알렉산드리아다. 등장인물을 모두 죽여가며 꽉 닫힌 새드엔딩으로 이야기를, 동시에 자신의 삶을 끝맺으려는 리오의 마음을 알렉산드리아가 붙든다. 리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며 공동 저자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렇게 마주 본 두 공동 저자는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고쳐 나가며 질주한다. 새드엔딩으로 꽉 닫히려던 이야기를 열어젖힌다. 익사하던 주인공을 물 밖으로 꺼내 살려낸다. 낙하의 방향을 틀어 날아오르기를 선택한다. 직선으로 떨어지는 나의 손을 잡아 반원을 그려 거꾸로 당겨 주는 네가 있을 때, 이야기는 추락에서 비상으로 전환된다. 비상하며 중얼거려본다. 낙하 속에 낙이 있다. 절망 속에 삶이 있다.


두 저자의 입에 의해 퇴고되고 퇴고되고 퇴고되는 환상의 이야기. 마침내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이야기가 잘 끝난 건 알겠고, 영화의 엔딩 역시 그러한가? 리오는 끝내 잘 살아남는가? 퇴원 후 알렉산드리아는 리오와 재회하는가?


영화(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시간을 빼앗는다. 2시간가량의 시간을 지불할 만큼 이곳에 앉아 이 이야기를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영화는 그 가치를 관객에게 이해시킬 의무가 있고, 때때로 엔딩으로 그 의무를 수행한다. 영화를 적절한 엔딩으로 잘 마감해 냈을 때, 그리하여 아름다운 이야기가 응당 아름다운 결말을 낳았음을 당당히 내보일 때, 영화의 가치는 잘 수긍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그 논리에 따라 자꾸만 둘의 이야기가 좋은 결과로 이어졌는지 확인받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더 폴>은 듣는 영화. <더 폴>에는 명확한 엔딩이 없다. ‘환히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 희망을 노래하는 리오와 알렉산드리아’를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리오는 또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수도 있다. 혹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은 이야기처럼 잘 살아냈을 수도 있다. <더 폴>은 어느 쪽도 결말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알렉산드리아의 편지를 읊으며 수많은 리오들의 삶을 비추는 장면들로 마무리할 뿐이다. 이 불확실성은 역설적으로 모든 결말을 긍정한다. 리오가 어떤 결말을 선택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빛나는 둘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고쳐 나가던 치열한 몰입의 순간들, 그것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더 폴>은 특정한 결말로서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증명하기보다, 그저 두 인물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응시하고 조명하는 데 119분을 온전히 바치기로 선택한 셈이다. 그 덕에 그들의 이야기는 어떠한 결말보다 선명히 우리 곁에 머물고, 그들의 삶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 끝없이 상영된다.


서두에 떠올린 질문을 다시 끌고 내려와 본다.


모든 희망으로부터 낙하해 절망뿐인 상황에도 인간은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 삶은 이야기와는 다른데도 말이다. 확실한 해피엔딩 따위는 없는데도 말이다. 절망은 언제나 나타나 우리를 절벽 아래로 떠밀고, 희망 한 톨 없는 그 무수한 순간마다 우리는 닫힌 결말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어질 텐데도 말이다.


러닝타임 내내 묵묵히 듣고 있던 영화가 끝에서야 입을 연다. 그렇다. 삶은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렇기에 결말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라는 질문은 공허하다. 추락과 추락과 추락, 그 이후에도 삶의 페이지는 그대로 열려 있을 뿐이다.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이야기와 달리 삶은 원하는 만큼 고쳐 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절망 속에 허우적대는 우리가 품어야 하는 건,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내야 한다고 거창하게 다짐하는 결말이 아닐 테다. 그보다는 하루하루의 퇴고가 모여 삶을 이룬다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기대일 것이다. 우리는 분명 그 연약한 기대에 기대어, 쓰디쓴 하루를 써 내려가다가 지워버리기도 하다가 지쳐 그만두다가 다시 써 내려가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끝끝내 다다른 장면이 혹여 볼품없을지라도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이야기는 절대 초라하지 않을 것이다.


활짝 열린 엔딩. 여전히 어두운 영화관. 영화가 끝난 이 순간에도 또렷이 존재하는 나. 올라가는 크레딧을 보며 위와 같이 믿었고, 믿음이 무색하게도 저 근거 없는 낙관을 비웃고 싶어지는 순간은 오늘도 찾아온다. 그 순간마다 <더 폴>이 다시금 고개를 내민다. 결말도 없이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은 채로 팔랑팔랑 우리 옆에 온 그 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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