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유독 손 편지를 좋아했다. 받는 것도 좋아했고, 정성을 가득 담아 써주는 것도 좋아했다. 10대 때는 막역한 친구들에게 '내 생일에는 선물과 함께 편지를 써서 달라'라고 대놓고 요구할 정도였다. 하지만 잘 되짚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손 편지를 좋아해도 자주 쓰지는 않았다. 손 편지는 나에게 진심을 종이 꾹꾹 눌러 담아 전할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을 전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내가 진심을 전하고 싶은 날이 1년 365일 중 얼마나 되겠는가? 어떠한 계기로 나의 진실한 마음이 상대방에 닿기를 바랄 때만 썼다. 그러니 손 편지는 나에게 '가끔 쓰는 것, 생일이나 먼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쓰는 것,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때 쓰는 것, 기념일에 쓰는 것'이 되어버렸다.
편지를 자주 쓰지 않는다면, 아마 '내가 편지를 써서 상대방에게 준 날'은 나의 인생에서 '꽤 중요한 날'이었을 테다. 편지를 상대방에게 준 날을 떠올린다면 나의 인생의 소중한 부분을 다시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서 편지를 쓴 역사가 궁금해져서 가장 처음 쓴 편지를 떠올려보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처음 쓴 게 아닌, 머릿속에 추억으로 남은 가장 첫 편지를 떠올려보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자신이 가장 처음 쓴 편지는 무엇인지, 자신이 진심을 다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 첫 편지, HOT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와 함께 -
초등학교 3학년 때 마른 몸집의 할아버지 선생님께 주소로 선물을 보내드릴 테니 가르쳐달라고 했다. 화 한 번 내지 않고 학생들에게 친절한 선생님의 얼굴빛이 갑자기 얼어붙었고, 난생처음 보는 표정에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자못 놀랐다. 머리가 커서 생각해 보니 선생님은 갑자기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니까 촌지 같은 걸 생각하신 듯하다. 계속 거절하던 선생님을 졸라 어찌어찌 주소는 받아냈다.
평소에 반에서 발표도 겨우 하던 내성적인 내가 뜬금없이 주소를 요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라디오나 테이프에 나온 곡들을 하나하나 녹음하고 붙여서 '인기 가요 탑 10' 테이프 등으로 만드는 게 유행했는데, 항상 친절했던 선생님께도 이걸 만들어서 선물하고 싶었던 거다. 이 생각은 기특했지만 선생님의 나이에 맞는 노래 취향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10살짜리 꼬마. 내가 좋아하는 HOT와 신화, 핑클 등 아이돌 노래만 몇 시간 동안 잔뜩 짜깁기하고, 편지에 곡 리스트를 쓴 다음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써서 보냈다.
여름 방학의 절반 정도가 지났을까. 우리 집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선생님의 답장이 도착했다. 나와는 전혀 다르고 워드의 궁서체와 똑 닮은, 연륜이 느껴지는 글씨체였다. 사실 선생님이 어려운 단어를 많이 써서 초등학생이던 나는 겨우 이해했지만, 단어와 분위기에서 고마워하는 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나의 진심이 전해져서 다행이었다.
초등학생의 순수함이 느껴지는 첫 편지 뒤로는 내 인생에서 다양한 편지의 역사가 이어졌다.
#1 고등학교 때 당시 공부하던 일본어의 감성적인 노래 가사를 편지에 함께 써서 전해줬더니 부엌 식탁에 붙여놓고 매일 보시던 아버지의 모습.
#2 성인이 된 후 카페의 매니저 오빠가 좋아져서 술에 취해 고백한 후(1차 흑역사), 오빠의 애매한 답변에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편지를 써서 고백했다가 거절당한(2차 흑역사) 처절하던 나의 모습.
#3 나이가 들어 지금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처음 써줬더니 지갑에 넣고 다니던 모습.
#4 1년 뒤에 편지가 전달되는 느린 우체통에 편지를 넣던 나의 모습.
#5 작년 말 영화 '헤어질 결심'의 '마침내 만났다'라는 표현이 좋아서, 남자친구 생일에 편지를 쓸 때도 마지막에 '마침내, 연경이가'라고 쓰던 나의 모습.
어느 하나 진심이 담기지 않은 손 편지는 없었다.
편지를 받는 순간도 기쁘지만 자신이 직접 써서 전달하는 순간도 귀중하다. 진심을 전하는 데 편지가 효과적이라는 걸 많은 사람이 알기에 매체에도 손 편지는 이따금 등장하곤 한다. 작년~올해를 대표하는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는 주인공이 증오하는 연진이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라는 진심이 꺾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편지를 쓴다. 자주 등장해서 편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연진아'라고 부르는 대사가 유행할 정도였다. 그 외 쇼프로 '금쪽 상담소'에서 오은영 박사는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다는 진심을 전하는 손 편지를 쓰라고 권하기도 했다.
더 글로리 포스터.
이쯤 되니 가장 아날로그 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귀찮을 수 있는 손 편지가 가장 빨리 진심을 전하는 매개체라는 생각까지 든다. 느리게 찬찬히 톺아볼수록 나 또는 상대를 귀중하게 여기게 된다.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보다 손 편지가 받는 이의 마음에 진하고 무겁게 남는다. 쓰는 이는 편지를 쓰면서 과거를 차분하게 되짚어볼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편지를 시작할 때 처음에 拝啓(하이케)라는 인사말을 자주 쓴다. 엄청난 의도가 있어서 쓰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편지 첫머리에 '친애하는 ~에게 / 안녕하세요' 등을 쓰는 것처럼 당연하게 쓰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단어를 보면 진심을 담은 편지가 시작되는 느낌이어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하이케로 시작되는 진정성 있는 편지처럼, 우리가 앞으로 쓸 편지 속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 진심이 묻어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과 함께 편지도 자주 전하는 건 어떨까. 어쩌면 당신의 진심이 쉽게 전달되도록 윤활유 역할을 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