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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Apr 26. 2024

30대, 나는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지 않았다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01. 이야기


몇 년 전부터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십 대에는 기다린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아닌 척했지만 삼십 대에는 진심으로 기다리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백마를 타면 탔지.

 

이왕 얘기하기 시작한 거 더 원점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애초에 ‘백마 탄 왕자님’이란 무엇일까? Chat GPT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아주 완벽하고 우아하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계모와 두 누이의 괴롭힘을 당하던 그녀를 신분이 높고,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많은 여성이 흠모하는 왕자가 운명처럼 나타나 구해준다. 어머니를 잃고 박복한 삶을 살던 신데렐라는 왕자님 덕분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라는 구절에서 이미 픽 비웃음이 흘러나오는 인생을 살게 됐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아버지가 말했듯 주로 고통이고 아주 가끔 기쁜 일이 생기는 게 인생이니까. 어느 순간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일보다 몇 번이고 백마에 오르는 데 실패해도 서툴게 직접 올라가는 일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 대가 되어 완벽하지 않아도 자신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길렀다고 여겼고 이에 따른 자신감과 자립심이 생겼다고 판단했다.




과거의 이별로 환상이 깨져서인지 상처받아서인지 능력이 실제로 좋아져서인지 모르지만, 이전 남자와 헤어진 후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인생을 살아나가야 하는지 생각했고 그 생각의 끝은 꽤 어두웠다. 혼자 하루를 열고 마감하기를 반복하면서 누군가와 함께하기보다 혼자서 크고 자잘한 일을 처리했다.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운동하고, 혼자서 가구를 조립하고, 혼자서… 혼자가 좋은지, 좋은 척인지, 힘든지는 정확히 정의 내리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곱슬머리의 그가 나와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ESTP인 그는 참 솔직해서 가족 관계부터 숨겨둔 이야기, 재정 상태까지 말했고 이는 나와 함께 걸어 나가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느껴졌다. 재미로 하는 MBTI 이야기지만 ESTP은 연애 초반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돈을 써서 행복하게 해 주려고 한다는 SNS의 글처럼, 그는 나에게 물질적으로 좋은 것을 많이 보여주고 선물했다. 그는 논리적으로 가치가 있는 존재 시간을 들이 싶다던 사람이었기에 나에게 시간을 내어 세세하게 신경 써주는 모습에서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솔직하면서도 논리적인 모습은 공상적이고 자신에 대해 함구하던 나에게 특별하고 똑똑한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단, 내가 혼자 지내온 기간이 길어서일까? 자신 이외에는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았기에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그에게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인생에서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언제든지 혼자서 거뜬히 인생을 살아낼 수 있도록 일도, 공부도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의지하기 싫다는 느낌보다는 언제든지 버림받아도 혹은 다시 못 보게 되어도 이별 거센 파도에 함몰되지 않고 멋지게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이는 헤어질까 봐 지레 겁을 먹고 한 생각이라는 것을.

 

“네가 날 어떻게 구원해.”

곱슬머리 그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마음속으로는 혼자를 자처했다. 혼자서도 잘 살아야 한다는 자신의 인생을 향한 책임감에 짓눌리면서.

 


 

곱슬머리의 그가 갑자기 조금은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 플러팅을 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이니 들어달라며 운전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지난 연애로 받은 형용하기 어려운 상처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상대를 못 믿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신은 내가 이전에 사귄 사람과 다르다고 했다. 나의 일하는 모습과 말투를 보고 그러한 생각을 했나 보다.

 

차는 어느새 부산 기장의 스타벅스 기장임랑원점에 다다랐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번 방문하지 않는 곱슬머리의 그인데 이곳의 운치 있는 풍경과 서양 가옥과 같은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자리를 잡고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생크림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이후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은 다르다며, 나는 너를 무조건 책임질 것이다, 자신은 책임감이 있다고 말했다.

 

넌 나를 더 믿어야 해.”

 

내가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속마음을 어떻게 안 거지? 그는 눈치가 빨라서 언제나 놀랍다.

곱슬머리의 그는 자신이 50만 원만 들고 일본에 일하러 간 이야기, 호주에서 그저 생존을 위해 일했던 고생담을 말했고 힘든 시절을 극복해 지금의 자신이 되었으니 나를 지킬 책임감은 충분히 있다고, 자신을 믿어달라고 해 주었다.

 

일본, 호주에서도 곱슬머리의 그는 나와는 성격이 참 달랐다. 나라면 해외에서 혹시나 실수할까 봐 몇 번이고 안내문을 확인하며 준비했을 텐데,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해외에 갔고 첫날부터 공항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 집에서 하루 묵었다고 한다. 그의 즉흥성에 웃음이 났다. 푸하하.

사실 미리 준비했다면 고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가서 부딪친 이야기 속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나서 웃음이 났다. 해외에서도 힘들지만 자유롭게, 계획은 있는 듯 없는 듯 유연하게 지냈겠지? 곱슬머리의 그는 계획적이지 않고 은근히 허술하다. 또 고생담을 듣다 보면 화끈하고 인생의 한 방을 노리는 것 같으면서도 자기 살길은 찾아놓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내 마음속에서는 이러나저러나 멋있었다...

 

그러면서 곱슬머리의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는 널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책임지겠다고 말해준 남자는 인생에서 처음이었기에 곱슬머리의 그가 카페에서 해 준 말은 이후에도 머릿속에 무겁게, 안정감 있게 자리 잡았다. 인생에서 나 이외에 ‘책임’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사용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고 이윽고 나는 그를 향한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안정이 느껴졌다. 정신과 몸이 이완되는 느낌이랄까?

 

서로의 부모님이 나이가 많은 편이니 네가 소개해주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말해달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는 말을 끝냈고, 그의 말은 거기까지였지만 내 인생은 꽤 달라졌다. 이날을 기점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으로는 지내지 않게 되었다. 불안해하지 않는 여유가 비로소 내 손에 들어온 듯했다.

 

너는 내가 책임지겠다,

무리하지 마라,

내가 널 먹여 살릴 테니까 날 믿어라...

 

이 말을 믿었을 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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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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