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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May 06. 2024

책임지겠다고는 했지만, 일을 놓는 건 안 돼(1)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가끔 유체 이탈을 하는 것처럼 감정과 나를 분리해서, 내가 지금 어떠한 감정을 겪고 있는지 멀찍이 떨어져 목격자처럼 지켜볼 때가 있다. 지켜본 소감은 항상 이렇다.

 

“난 왜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을 하고 살까?”

 

최근에 한 필요도 없는 걱정은 곱슬머리의 그가 ‘미워 보이지 않아 큰일이다’였다. 연인이 사랑스럽다면 그 자체로 행복 아닌가. 하지만 혹시나 미워 보이지 않아서 객관적으로 상대를 보지 못해 나중에 후회할까 봐 걱정했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이 글을 읽어주시는 소중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미워 보이지 않아서 고민일 정도인 사랑스러운 곱슬머리의 그지만, 밉다는 감정과 별개로 그의 장점이자 단점인 부분들을 사귀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하나씩, 하나씩.

 



첫 번째. 어느 날 곱슬머리의 그와 통화하다가, 그가 순간적으로 화가 났는지 나에게 화를 버럭 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나는 충격을 받았지만 웬걸, 곱슬머리의 그는 그날 통화가 끝나기 전에 이미 화가 풀렸는지 해맑은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결국 당혹스러움이라는 감정에 갇힌 나는 혼자 끙끙 앓다가 나중에 겨우 얘기를 해서 잘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감정이 겉으로 바로 드러나고 곧바로 잊어버리니 알기 쉬워서 쓸모없는 감정 소모가 줄어든다는 장점도 있다. ESTP인 그에게 특히 감정에 관한 기억은 순삭이다.

 

두 번째. 곱슬머리인 그의 부모님이 유럽 여행을 하시면서 감사하게도 나에게 머플러를 사주셨다. 머플러 사진을 본 뒤 예쁘다며 평소에도 머플러를 좋아해서 분명 자주 메고 다닐 거라고, 행복하다고 말해주었더니 ESTP인 그는 말했다.

 

근데 이제 여름이니까 가을은 되어야지 쓸 수 있지 않을까?”


저기요, 선생님… 옳은 말이지만 선물을 받아서 훈훈한 분위기가 넘치는 지금 꼭 그 말을 해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세 번째. 어느 날 물건을 잃어버려서 찾다가 목욕탕에 두고 온 걸 알고, 귀찮은데 또 운전해서 목욕탕에 가야 한다고 푸념하던 내게 ESTP인 그는 말했다.


찾았으니 됐지, 뭐. 가서 들고 오면 되겠네.”


저기요, 선생님… 옳은 말이지만 저는 "목욕탕까지 또 가려면 귀찮겠다, 고생이 많네", "너 일도 해야 하는데 피곤하겠다" 이러한 따뜻한 감정이 담긴 대답을 원했는데요… 곱슬머리의 그는 감정보다는 사실을 입에 담는 게 익숙하다.

 

결국 감정은 비교적 순삭 되는 성격과 사실  말해야지 속이 시원해지는 성격인 그와 정반대 성격을 지닌 나는 어느 날 서로오해하게 다.

 


 

지난 편에서 언급했듯이 곱슬머리의 그는 내게 ‘너는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이 말에 안정감을 찾아 무언가에 쫓기던 마음이 사라졌다. 물론 열심히 일하지만 예전처럼 한 달 동안 쉬는 날 없이 일만 하는 등 무리는 하지 않으려고 힘쓰기 시작했다.

 

이후 그와 대화를 나누며 나는 자연스럽게 일을 줄이겠다’라는 말을 몇 번 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연히 일을 열심히 하지만, 지속 가능한 번역가가 되기 위해 번아웃에 걸려 쓰러지지 않도록 적당히 일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11시. 잠은 솔솔 오고 전화 상대는 사랑스러운 연인이니 마음마저 노곤해져 ‘일을 줄이겠다’는 말을 무심코 한 번 더 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뱉고 난 후 곱슬머리의 그는 말했다.

 

내가 너를 책임지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일은 놓지 마.”

 

곱슬머리의 그도 내가 일을 줄이겠다고 몇 번이나 말하니 신경이 쓰여서 한 말일 테다. 하지만 불쑥 화가 나서 목소리가 커졌다.

 

일을 줄인다’의 기준이 우리는 다를지도 모른다. 나는 주변에서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일하라고 몰아붙이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라서, 그가 굳이 나서서 일을 놓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일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나에게 일을 줄인다는 뜻은 한 달에 한, 두 번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쪽잠을 자며 일하던 삶에서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일하고 남은 시간은 청소하고, 책을 보고, 저녁을 맛있게 먹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나 같은 사람에게 일을 아예 놓지 말라고 해봤자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난 평소에 자신을 몰아붙여서 일하는 사람이야! 네가 말해봤자 스트레스만 받는다고!”

 

나는 그저 일하느라 고생했다는 말, 격려와 위로의 말만 듣고 싶었나 보다. ‘일을 완전히 놓지 말라’는 그의 말이 예전에 한 '그렇게 고생하면서 일하지 마라', '내가 널 책임진다'는 말과 무언가 앞뒤가 안 맞게 느껴졌다. 그의 배려가 부족했는지, 내가 이기적으로 그의 말을 자기 언어로만 해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얼마 전 카페에서 나눈 ‘책임진다’는 말을 꽤 다르게 해석하는 듯했다.

어는 날 곱슬머리의 그가 나에게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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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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