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와 크림 파스타를 처음 먹은 곳에 있던 꽃바구니.
“내가 널 책임지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일을 놓지 마.”
곱슬머리의 그가 나를 책임지겠다는 말을 하고 며칠 후 나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이 말을 들은 다음 날. 당시 “완전히 일을 놓지 마”라는 말에 울컥했지만내가 느낀 울컥하는 감정이 올바른지, 아니면 과도한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난 이야기에서 썼듯 그가 책임지겠다고 말한 후 나는 앞으로 일을 줄이겠다고 몇 번 말했다. 일을 계속 줄이겠다고 하니 그가 걱정되어 '완전히 일을 놓지 마라'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지나치게 편협하며 극단적으로 생각을 단정 지을 때가 있다. 이는 단점이기도 한데, 곱슬머리 그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생각의 회로가 오로지 ‘나보고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 마라, 내가 널 책임지겠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일을 놓지 말라고 하네? 그렇다면 쟤는 도대체 나의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거지?’라는 식으로만 흘러갔다.
곱슬머리 그의 말을 듣고 일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은 내려놓고 여유를 느끼며 자신에게 너그러워진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일을 완전히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예전처럼 번아웃에 걸리지 않도록 워라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보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나서서 일을 완전히 놓지 말라고 훈수를 두니(그로서는 훈수가 아니었지만) 짜증이 훅 밀려왔다.
이번 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일’이라는 자신을 살리기도, 힘들게도, 우쭐하게도, 지질하게도 만드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존재에 누군가가 이래라저래라, 그만두라 혹은 계속해라 등으로 끼어드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일하는 것만으로 힘든데 일에 관한 건 내가 결정할 거야, 흥!’ 이렇게 대응한다는 걸.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라는 노래 가사처럼 일은 내게 꼭 있어야 하지만 금방 터질 듯이 예민하고 귀찮기도 한 존재였다...
'일을 놓지 말라'라는 말에 순간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에게 굳이 콕 집어서 무엇 때문에 화가 났다고 말하지 않았고, 곱슬머리의 그는 어제 자신이 한 말로 내가 속상해했다는 사실을 바로 잊은 듯했다. 그는 평소에 말이 아주 많고 그 무수한 말을 재미있게 한다. 단 한 가지, 지금은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바뀌었지만 당시 그는 나에게 말을 많이 하는데 무게감 없이 쉽게 휘발되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쉽게 말하고 빨리 잊는 사람이었고 나는 적게 말하고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표현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는 쿨하지만 어찌 보면 단순했고 나는 신중하지만 어찌 보면 자주 꿍해지는 사람이었다. 시원시원하게 말하고 금방 잊는 성격이 그의 매력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아니었지만...
나에게 일을 완전히 놓지 말라고 한 다음 날, 곱슬머리의 그는 주변 지인을 이야기하며 잘 사는 집을 보면 여자도 돈을 잘 벌 때가 많더라고 이야기했다. 쉽게 말하고 빨리 잊는 그의 성격을 비추어 보았을 때 이 또한 악의 없이, 생각 없이 가볍게 한 말일 테다. 무언가 엄청난 큰 그림을 그리고 나에게 간접적으로 지인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바로 어제, '일을 완전히 놓지 말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나에게는 무조건 일하라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불편한 감정을 느꼈음에도 나의 입은 “일은 절대 그만둘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마. 일을 계속해서 우리 관계에서 필요할 땐 책임지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거야.”라며 떠들고 있었다. 지난 글에서 썼듯이 연애 초반이라는 달콤한 시간은 곱슬머리의 그를 미워할 틈을 주지 않았기에 그의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단, 이 말은 덧붙였다.
“며칠 전에 네가 나에게 책임진다는 말을 했잖아. 솔직히 네가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책임진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책임진다는 말은 아무한테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내게 책임진다는 말을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내가 책임지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처음에 "그럼 네가 책임진다니까 어딘가에 투자를 더 할까…" 이러면서 장난을 치더니 나중에 메시지로는 그리 말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하트 이모티콘과 함께.
주말 오후, 10시가 좀 넘었을 때였다. 푸짐하게 차려진 화덕 족발 세트를 눈앞에 두고 그는 갑작스럽게 캐나다에 있는 자신의 셋째 누나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족발과 함께 소주를 마셔 벌겋게 된 얼굴로 갑자기 시차가 13시간 차이 나는 곳에 사는 그의 누나와 인사하게 된 나는 카메라에 비치는 내 모습에 어색해하며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이후 상대방이 무어라 좋은 말을 해주었는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카메라 속 내 모습과 목소리가 이상하진 않았겠지, 하며 걱정하기 바빴다. 짧은 통화에서도 누나와 가볍게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그를 보니 가족을 대하는 방식도 친언니를 대하는 나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우리 가족은 그들의 대화보다는 고요했다.
곱슬머리의 그는 갑작스럽게 그의 가족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다른 얘기지만 이 화덕 족발 가게에 올 때도, 아니, 평소에도 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나와 달리 그는 택시만 타는지라 운전하지 않으면 택시를 함께 타고 다녔다. 덧붙여 평소에 그는 감정은 제쳐두고 원인을 궁금해해서 “너는 왜 항상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거야?”, “너는 왜 손에 땀이 많이 나는 거야? (다한증이라서 그렇다…)”, “오늘 네 머리에서 꼬순내가 나! 히히~.” 등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상대가 곤란해할 수도 있는 질문과 말을 하곤 했다. 나와는 다른 행동과 말과 사고를 하는 그를 보니 동성이었다면 친해지기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한하게도 우리의 사이는 점점 깊어졌다.
위에서 나열한 이야기는 상대에게 솔직한 그와 어지간한 상대의 변화는 함구하는 나의 성격 차이일 뿐,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 통했다. 곱슬머리의 그는 그랬다. 그저 재미있고, 가끔 내 기준에서 악마 같이 말하고,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씩씩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돈을 쏟아서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의 싹을 심어주었다. 30대에 시작한 연애였기에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자주 해서 사랑이 더욱 견고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류의 단단한 믿음은 연애하면서 처음이었다. 곱슬머리의 그는 나를 확실히 사랑하고 있었다. 애초에 곱슬머리의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믿음이 전제로 깔려 있어서인지 그가 셋째 누나에게 갑작스럽게 전화를 거는 행동도 이기적이라기보다는 나와 달라서 통통 튀고 재밌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많은 것이 스펙터클 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누나에게 내 여자친구 예쁘지 않냐며 순수한 표정으로 묻는 그를 보니 미워할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느새 전화를 끊고 웃는 나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책임’이라는 말을 요새 자주 꺼냈잖아. (술을 한 잔 들이켜며) 하아, 나 좀 억울해.”
말을 끝내고 다시 소주를 한 잔 들이켠 그는 ‘김연경을 책임진다는 말’과 ‘김연경이 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주제라고 말했다. 김연경이 일하든, 안 하든 곱슬머리의 그는 김연경을 반드시 책임질 것이고, 일을 놓지 말라는 뜻은 김연경이 무조건 일은 계속할 생각인 듯하니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완벽하게 이해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책임진다’는 말을 깊게 생각한 뒤 오해라고 설명하는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꽤 빨리 부드러워졌다. 쉽게 말하고 빨리 잊는 성격이라서 '책임진다'는 말도 금세 잊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말이 자주 바뀌는 깃털처럼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중하게 생각해서 말하는 모습을 보니 몰랐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 듯해 신기했다.
곱슬머리의 그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너는 아닌 것들, 네가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나는 아닌 것들을 보고 느끼게 될까. 나는 심각한데 상대는 그까짓 것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 갑갑하고 속상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