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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May 18. 2024

속상하기도 했지만 무서웠던 것이다. (1)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예전에 일본 쇼프로를 보다가 들은 얘기가 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좋은 음원 성적을 거두며 아예 자리 잡고 사는 연예인이었는데, '일본에 살면서 무엇에 가장 유의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그레이 존을 인식하는 것"


이라고 답했다. 어떠한 일에 흑과 백, 옳고 그름의 딱지를 붙이기보다는 모호한 회색(그레이)처럼 느껴지는 일을 겪어도 '그럴 수 있지' 하며 어정쩡한 상태로 두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의 답변. 외국인으로 그 땅에 발붙이고 살며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모습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연예인과 달리 그레이 존을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까운 사람에게 옳고 그름의 잣대를 쉽게 가져다 대고 확실히 판단 지으려는 사람이다. 모호한 상태로, 그러려니 하고 두지를 못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면 이렇게 되는 게 도덕적으로 당연한데 왜 저럴까?'


'왜 고집을 피우지?'


곱슬머리의 그에 관해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몇 개도 아니고 하나였지만 이 하나의 그레이 존을 가만히 보기가 어려웠다. 그가 아무리 사랑스러운 말을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 하나가 눈앞에 펄럭거렸고 밉게 보일 때가 있었다.


언젠가 내가 '프로 손절러'로서 그에게 지금까지 인연을 끊은 사람들을 얘기했을 때 그는 "연경이는 밴댕이 소갈딱지예요~. 푸하하. 너무 쉽게 사람들을 밀어내지 말고, 마음을 넓게 가지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주었고 실제로 이후 나의 마음은 조금 넓어졌다고 생각한다(물론 당시에는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에 "예민한 성격이라고 해줄래?", "감성적인 성격이라고 해줄래?"라고 되받아쳤었다...).


그러나 죽었다 일어나도 상대의 이해하지 못할 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나와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그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타인이었기에 그레이 존은 존재했다. 나는 결국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인간관계에서 필수불가결한 그레이 존을. 세상에 내 입맛에 꼭 맞는 완벽한 사람은 없음을.




곱슬머리의 그가 혼자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태국은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 가보았지만 몇 시에 출발했는지조차 잊은 나였기에 부산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태국에 도착, 태국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부산으로 돌아오는 그의 일정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짧게 2박 3일. 곱슬머리의 그는 부산으로 돌아오는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 전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너무 짧아서 피곤이 풀릴 시간이 없었어..."


사실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ESTP과 INFJ라는 MBTI뿐만 아니라 여행 방식도 극과 극이었다. 일본에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 새벽 다섯 시부터 초밥집 오픈런을 하러 갔던 나와 달리 그는 2박 3일 태국 여행하는 동안 '터미널 21'이라는 쇼핑센터에서 일본 라멘을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호텔에서 잠을 잤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휴양 여행 애호가인 것이다. 그 정도로 잤으면 피곤이 풀릴 법도 한데 안 풀렸다니 본능적으로는 이해를 못 했지만, 그럼에도 내 눈에 그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저 최근 바빴던 그가 조금이라도 힐링했기만을 바랐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에도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사랑 때문에 좋을 때도, 미울 때도 있지만 그는 나로 하여금 흔연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두 시간의 시차를 지닌 방콕과 부산. 곱슬머리의 그보다 두 시간 빨리 삶을 받아들이고 있던 나는 한창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라는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구김 없는 인생을 살아왔음에도 왜인지 처연해 보이던 한 인물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며 소설이 절정에 다다르자, 나의 과몰입도 최고점을 찍었다. 책을 읽은 시간은 감성적이기 쉬운(청승맞게 되기 쉬운) 저녁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던 때였다. 그날 몇 시간 전 오랜만에 만난 엄마, 아빠의 모습에서 유독 세월이 느껴져 서글펐는데, 여기에 음울한 소설의 내용까지 보자 마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검불덤불 꼬여버렸다.


그때 부산으로 귀국하는 비행기가 지연됐다며 2일 만에 전화를 한 곱슬머리의 그는 나에게 주려고 산 선물과 종일 비가 왔던 태국 여행의 간단한 감상을 종알종알 귀엽게도 말했다. 어쩜 그리도 스몰 토크를 잘하는지 그와 얘기하다 보면 특유의 가볍고 산뜻한 대화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워 그의 얘기를 듣다가 전화를 끊은 후 '보고 싶어, 조심해서 와'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연경아, 나 내일 괜찮을까?

좀 피곤할 것 같기도 하구...'


그의 답장이었다. 내일 한국에 오면 오후에 만나기로 한 우리였다. 그는 피곤하니 내일 못 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응. 피곤하면 다른 날 봐두 돼. 일단 조심히 돌아와요(하트)' 이렇게 보내고 스마트폰을 옆에 던져둔 채 침대에 정자세로 누웠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자신의 행동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울고 있었다. 곱슬머리의 그는 계획이 없거나 자주 바뀌는 사람이었다. 피곤하면 갑자기 못 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성적으로 그의 말이 일리가 있고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속상해서인지, 내가 밴댕이 소갈딱지여서인지, 새벽 시간이라서 감성적으로 되었기 때문인지 울고 있었다.


연애 초반에 내가 일본 도쿄에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을 때 곱슬머리의 그는 공항까지 왔었다. 청록색 캐리어를 차에 싣고 김해 공항에서 먼 대연동으로 향하면서,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당일 3월에 자신과도 일본 여행을 가자며 즉흥적으로 얘기했었다. 그때가 생각나 이번에 태국에서 돌아오는 그를 마중하러 공항에 가겠다고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할 예정이니 데리러 오지 말고 오후에 보자고 한 그였다.

나는 도쿄 여행에서 돌아올 때 그에게 줄 적당한 가격의 맥주와 후지산 모양의 과자, 내일도 사랑하자는 '사랑'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편지를 함께 줬다. 반대로 그는 여행 갈 때마다 면세점에서 립스틱을 하나씩 사다 주었다.


뜬금없이 머릿속에서 과거의 추억이 소환되었는데, 추억을 톺아본 결과 여행에서 돌아오는 상대를 마중하는 것부터 어떤 선물을 주는지까지 그와 난 꽤 달랐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와 별개로 내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더 정확하게 밝혀내고 싶었다. 이대로 자면 마음에 돌덩이가 앉은 듯 내일 아침부터 불편할 게 뻔했다. 머릿속 생각을 끊임없이 파고들고 나누고 걷어내서 우는 진짜 이유를 밝히려고 애썼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늘 소설을 읽었고 주인공과 가까운 이가 떠나는 장면을 보며 마음이 저렸다. 때마침 오늘 부모님과 함께 모양만 화려하고 맛은 안타깝게도 부족한 중식을 먹으며, 유독 몸에 쌓인 피로를 떨쳐내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에세월과 함께 나이가 든 모습이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다. 때마침 오늘 다른 국가의 하늘을 바라보던 그와 며칠 만에 통화를 했고 그는 내일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만남을 기대하며 이번 주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정을 비워두고 계획만 세워둔 참 MBTI J스러운 김연경. 계획이 통째로 공중분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속상하기도 했지만 무서웠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을 떠나버린 그 사람처럼, 나도 소중한 사람들이 언젠가 내 곁을 떠날까 봐 무서워서 눈물을 흘려버렸다. 소설의 과몰입과 불길한 확장을 잘하는 머릿속이 빚어낸 참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슬펐다.


눈물을 흘린 이유는 알았지만, 이러한 멜랑꼴리하고 이성적이지 않은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듯했다.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결국 곱슬머리의 그에게 이러한 생각을 일체 함구했다.

코모레비(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가 아름다운 5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ESTP과의 만남은 스펙터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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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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