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부산 유명 카페 웨이브 온에 그와 둘이서.
01.이야기
“나는 무리를 해야 해.”
곱슬머리의 그가 일주일에 두 번은 나를 만나야겠다기에 무리는 하지 말라고 했다니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나’는 무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몰래 ‘나’를 ‘우리’로 치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십 대의 우리는 바쁘다 보니 무리를 해서라도 시간과 체력과 돈을 서로에게 쓰려고 노력해야 했다. 요식업을 하는 곱슬머리의 그는 매일 아침 여덟 시 반에 출근해 저녁 아홉 시에 퇴근하고, 프리랜서 번역가인 나도 아침에 일을 시작해 저녁 아홉 시가 다 되어 갈 때 업무가 끝난다. 사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쁠 때는 주말도 포기하고 새벽까지 ‘이 일 좀 제발 끝났으면’ 하고 기도하며 일에 매달리기 일쑤다. 안타깝지만 서로의 직업이 이렇다.
그 외에도 등에 백팩을 메고 양손에 종이 가방을 잔뜩 든 채 걸어가는 사람처럼,이십 대 때와 달리 삼십 대 때는 쥐고 있는 것, 책임지는 것이 유독 많았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정해진 시간에 일을 끝내면 쪼르르 달려가서 연인을 볼 시간과 체력이 있었다. 그뿐이랴, 달콤한 데이트를 하고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모님이 보일러를 켜두어서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집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돈 한 푼 쓰지 않아도 집안에는 밥, 과자, 빵… 먹을거리가 풍성했으며, 이곳에 내가 책임질 것은 없었다. 밤새 연인과 통화해도 다음 날 커피 한 잔을 마시면 금세 피곤이 풀린 멀끔한 얼굴로 돌아왔다.
삼십 대가 되자 집, 일, 취미 생활 등 직접 책임져야 할 일들이 내 등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보일러 온도를 올려두어도 어쩐지 본가보다 차가운 집안이지만, 혼자 사는 전세 집조차 관리비와 임대료를 매달 내려면 꽤 부담스럽다. 건강 보험료가 갈수록 오를 뿐만 아니라 삼십 대가 되니 늘어나는 나이만큼 병원에 가는 횟수와 비용도 늘어났다. 거기에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려면 취미인 그림도 그리고 예쁜 것도, 영화도, 드라마도 봐야지, 맛있는 음식도 먹어야지, 수중에 있는 돈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재테크도 해야 했다. 이십 대의 끝에 겨우 손에 부여잡은 프리랜서 번역가라는 직업도 어떻게든 지키려고 마음이 메말라 번아웃에 걸릴 때까지 일하면서 절대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다.
양손에 잔뜩 든 짐을 보고 다른 사람이 다가와도 폐를 끼치기 싫어서, 애써 손에 넣은 것을 놓치기 싫어서, 내주기 싫어서 등 여러 이유로 곁을 내주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순수하게 누군가를 곁에 두고 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문득 어느 커뮤니티에서 본 한 남자의 댓글이 생각났다. 삼십 대가 되니 혼자 있어도 꽤 편한데 상대방(여자)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고도 계속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십 대 때만큼 열렬히 상대를 위하는 마음을 갖기 쉽지 않다는 글이었다. 이 남자의 말처럼 삼십 대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기는 어려울까?
2월, 이러한 나의 의구심을 송두리째 깨뜨린현재의 남자친구, 곱슬머리 그가 나타났다. 그와 자주 함께하고 싶었지만 이때 번역 업무가 밀려 들어와서 아주 바빴다. 나에게 일은 절대 놓치기 싫은 소중한 자산이었기에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종일 방에 앉아서 일하곤 했다. 여기에 놓치기 싫은 보물인 곱슬머리의 그와 보낼 시간을 만들어 끼워 넣으려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또 당시 다이어트에 막 성공했던 때라서 요요 현상이 나타날까 봐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더니 힘도 나지 않았다. 곱슬머리의 그와 잘될지 모르겠고, 머릿속이 복잡해서 일도 안 되고, 배는 고프고, 총체적 난국으로 느껴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결국 다이어트 때문에 살이 찌는 음식은 못 먹겠고 마감일은 오늘이니 한 잔만 마셔보자며 혼자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일했다. 어떠한 요소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소주를 한 잔 마시니 깜짝 놀랄 정도로 집중이 잘 되어서 오랜만에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서 일했던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소주를 마시고 일했습니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곱슬머리의 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당시 나는 소주에 의지할 정도로 무리하고 있었다. 한정된 시간 내에서 곱슬머리의 그도, 일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모두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두고 싶었다.
몸과 정신이 더 망가지지 않으려면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과감하게 인생의 1순위를 일에서 곱슬머리의 그로 바꾸었다. 업무에 아무리 몰두하고 바빠도 곱슬머리의 그와 통화하는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일이 바빠서 통화를 못 하거나 만나지 못하는 일은 만들지 않았다.
딱히 일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눈치가 빠른 곱슬머리의 그는 내가 일로 바쁜데 자신이 방해가 될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이에 나는 "너만큼 나에게 중요한 건 없어. 앞으로도 너와의 약속이 가장 소중해."라고 답했고 실제로 그리 행동했다. 나뿐만 아니라 곱슬머리의 그 또한 저녁 늦게 일이 끝나면 차를 타고 나를 보러 오면서 나에게 시간과 돈을 썼다. 바쁜 삼십 대가 누군가에게 시간과 돈을 쏟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곱슬머리의 그와 2월에 만난 후 이윽고 봄이 찾아오고, 이후 벚꽃이 맺힐 때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쉽게 연인이 1순위를 차지했던 이십 대 때와 달리 삼십 대에 누군가를 온전히 가장 높은 1순위에 둔다는 것은 꽃샘추위와 비바람을 극복하고 드디어 맺힌 벚꽃처럼 나에게 꽤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1순위에 둔 지금, 마음속의 최고로 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지금 이 순간까지 마음이 햇봄처럼 따스하니까… 지금도 서로의 1순위인 그와 나는 눈을 마주 보며 말한다.
“너한테 쓰는 건 하나도 안 아까워.”
물론 서로를 1순위에 두고 노력하지만, 삼십 대의 저질 체력은 무시할 수 없고 일을 아예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그와 만나기 위해 전날 밤을 새워 일할 때도 있었고 만난 후에도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매일 우리는 아침이 되면 전날 잠은 잘 잤는지, 컨디션은 괜찮은지 메시지로 상대의 건강을 확인한다.데이트를 하다가 약국에서 비타민을 사 먹거나 힘을 내기 위해 달콤한 음식도 굳이 찾아서 먹는다. 잠을 깨우는 커피도 데이트에서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