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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Apr 07. 2024

30대 여성, 새벽 두 시에 참치 비빔밥을 먹었다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여성, 새벽 두 시에 참치 비빔밥을 먹었다

 

곱슬머리의 그와 두 번째 만남 때 카페에서. 난 흰 셔츠, 그는 파란색 신발과 옷.

01.이야기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는 ‘나만의 안전장치’라는 표현이 나온다. 공황장애로 대기업까지 그만둔 유찬은 친구 다은의 응원에 힘입어 면접을 보러 가지만, 면접장에서 다시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난다. 홀로 화장실로 겨우 도망쳐 창문 옆에 기대어 서서 컥컥거리기 시작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살려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유찬은 본인이 만들어 낸 가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좁디좁은 화장실에서 죽음을 느낀다. 


실수로라도 바다에 빠져본 이는 알리라. 머리 위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얼마나 힘없는 존재인지를. 그때, 공황장애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목 언저리의 친구이자 짝사랑하는 여자 다은이 준 넥타이를 만지고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유찬에게는 죽도록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자신을 살릴, 마음이 편해지는 안전장치가 친구에게 받은 넥타이였다. 자신을 구원하는 유일한 안전장치.

 

나는 이전 남자와 헤어진 후 7kg가 빠졌다. 처음에는 이별한 후 자신의 초라함을 덧칠하기 위해 어떠한 목표라도 하나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침, 점심만 대충 먹어도 쭉쭉 빠졌다. 이 문장이 중요하다. 분명 식욕이 많던 자신이 ‘아침, 점심만 대충 먹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음에도 그까짓 거 대충 먹고살아졌다. 식욕의 변화는 깨닫지 못한 채, 십여 년 만에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며 그저 좋아했다.

 

재택근무자인 프리랜서 번역가의 특성상 혼자 방 안에서 업무에 몰두하다가 그까짓 거 대충 밥을 챙겨 먹는 일상이 제법 이어졌다. 죽음을 느끼는 순간은 생각보다 급작스러웠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의 쳇바퀴를 돌다가 어두운 거실 창문 밖을 보았는데, 문득 좋아하는 밤 풍경이 부질없게 느껴지더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살아갈 필요가 있나?’

 

갑자기 든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이별의 아픔으로 마음에 눌어붙은 우울감을 깨달았고, 나 또한 나만의 안전장치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안전장치는 이전 남자가 남긴 물건이었다. 사진, 편지 같은 것들. 이전 남자의 냄새가 아직 배어 있는 물건을 안고 울면서 겨우 살았다.

 




 

현재 남자친구인 곱슬머리의 그와 두 번째 만났을 때, 어두운 차 안에서 안전장치를 이야기했더랬다. 7년 사귀고 헤어졌다느니,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었다느니, 이전 남자의 물건을 안고 견뎠다느니, 청승맞게 우울의 바다 옆을 홀로 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었던 이야기를 했다. 이때는 살이 빠져서 49kg가 된 상태였다.

 

내 기억에, 그는 나의 이야기에 당황해서 순간 말을 더듬었다. 0.2초 정도? 평소에 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니 당황하면 티가 많이 났다. 그럼에도 그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바로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차 안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좀처럼 없던 침묵이 몇 초간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차 앞 창문을 바라보던 곱슬머리의 그가 내 손을 덥석 잡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다고 하자 그럼 앞으로 자신과 만나자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왜 좋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물어보니 자신은 가까운 사람만 챙기는 성격인데 나에게서 모두를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좋다고 했다. 예뻐서 좋다고 했다. 일하는 모습도 멋있단다. 놓치기 싫다고 했다. 지켜주고 싶다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감사한 고백의 말이 이어졌음에도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미 흔들리는 이성이 겨우 브레이크를 걸었다.

 

두 번째 만났는데 사귀자고 할 줄이야…

우리는 성격이 꽤 달라서 싸우지 않을까…

 

심지어 우리는 서로의 일이 바빠서 저녁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잠깐 만나던 사이였다. 적어도 밥 한 끼는 함께하고 사귈지 말지 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얘기했더니 서로 좋아하고 어느 정도 알았는데 왜 식사까지 해야 하는지, 식사할 때 깔끔하게 먹는지 등을 보려고 하냐며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 먹는 밥도 함께 먹은 적 없는 사람과 사귀기에는 너무 빠르다는 뜻으로 말한 내용이거늘. 밥을 먹으며 쌓은 정은 무시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나와 사귀기 전에 밥 한 끼를 굳이 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 그는 참 생각이 달랐다. 그래서 좋았다.

 




 

'미래에 누군가와 사귀고 결혼한다고 행복할까?'

'네가 없는데 행복할까…'

 

곱슬머리의 그를 만나기 전에 했던 생각이다. 이제 와서 되짚어 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혼자서 결혼, 이전 남자의 존재를 떠올리며 슬픈 감상에 빠졌지만 골똘히 들여다보면 나는 그저 겁먹었을 뿐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했을 때 또다시 깊이 상처받을까 봐 움츠러들어서 자신에게 답 없는 질문만 던졌다.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들인데. 그저 다시 단순하게 시작하면 되는 일인데.

 

밥 한 끼를 얘기하며 사귈지 말지 결정을 미루는 나에게 곱슬머리의 그는 꽃이라도 사 와야 했었다며 탄식하고는, 특기인 말주변으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되려는 마음, 함께하려는 마음이 느껴지는 고마운 행동에 이야기를 듣다가 에잇, 고백을 수락해 버렸다.

 

이리하여 우리는 겨우 두 번 만났지만 이미 서로에게 푹 빠져서, 왜 좋아하는지 막힘 없이 술술 말하는 곱슬머리의 그와 달리 부끄러워서 답답할 정도로 한참 눈알만 굴리다가 겨우 ‘눈이 멋있어서’라고 답한 나지만 그럼에도 좋아서,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키스를 하다니 나의 기준보다 너무 빠르다며 앞으로의 진도가 하이패스를 지나가는 차량처럼 얼마나 거침없을지 걱정하면서도,

 

참으로 단순하고 마음이 끌리는 대로 30대의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ESTP인 그의 단순함에 구원받은 적도 많다.

 




 

곱슬머리의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몸의 변화를 느꼈다. 조용한 곳에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까 봐 신경이 쓰일 정도로 배가 너무나 고팠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허기여서 적응을 못 할 정도였다. 몸에 막혀 있던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와 사귀기로 하고 집에 왔다. ‘어떡해, 사귀기로 했어!’라고 작게 외치며 혼자 사는 집 거실의 길쭉한 베이지색 소파 위에서 뒹굴다가, 좋아하는 일본 음악을 틀고 멍하니 밤 풍경을 바라보다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려 일기를 쓰면서 몇 시간 동안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은 오지 않고 아까부터 허기진 배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새벽 두 시, 찬밥과 통조림 참치, 각종 나물과 고추장을 섞고는 홀린 사람처럼 배고파서 제대로 비비지도 않은 밥을 입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쑤셔 넣었다’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다이어트는… 아, 몰라. 내일부터 어떻게든 하겠지. 원래 먹던 밥의 몇 배를 먹고 나서야 숟가락을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앞으로 순탄하게 사귈지 모르지만,

앞으로 우리가 잘 맞을지 모르지만,

미래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의 식욕이 되돌아왔다.


식욕이 돌아온 후에야 알았다. 입맛을 많이 잃은 채로 살았다는 것을. 인생을 살아내자 똑같이 인생을 살아내 온 새로운 누군가가 내 곁에 서주었다.

 




 

곱슬머리의 그와 사귄 직후 안전장치라고 부르던 이전 남자의 물건을 집안 쓰레기통이 아닌 집 밖 1층의 쓰레기 버리는 곳에서 정리했다. 처리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를 말했더니 곱슬머리의 그도 실은 신경이 쓰였다며,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유찬은 자신의 안전장치인 짝사랑하던 다은이 준 넥타이를 언젠가는 버렸을까? 드라마에서 유찬을 응원하던 자신을 떠올리며, 자신을 살리던 안전장치를 버리고 머리를 비운 채 단순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한 발을 내디뎠다. 이 길은 어떤 길일까?

 



02. 추억


사귀고 난 후 곱슬머리의 그와 처음 본 야경. 부산 황령산. 나는 그가 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까 무서워했다.
사귀고 난 후 곱슬머리의 그와 처음 먹은 고기. 내가 너무 잘 먹어서 먹보처럼 보일까 봐 걱정했다.
사귀고 난 후 준 편지. 잘생긴 사람이면 아무리 바쁜 프리랜서도 시간을 내서 만납니다는 말.




03.정보와 추천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드라마 제목처럼 주인공인 간호사 다은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그린 드라마. 다양한 사람의 고민과 헤쳐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마저 위로받았던 드라마예요.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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