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트볼 스파게티
신은 공평하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한다. 회사에서 일 좀 한다는 여인들은 일을 얻었지만 그녀들이 꿈꾸었던 다른 하나를 잃었다. 그 다른 하나는 아쉬움을 넘어 영롱한 아련함이 되어 사라진 듯 그녀들의 깊은 마음속에 꼭꼭 숨겨진다. 일이 전부인 그녀들은 일에 미쳐서 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일 밖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두 눈을 감으면 사는 게 쉬워진다’는 비틀스의 노래 가사처럼… 그녀들은 그렇게 두 눈을 감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의 모든 감각을 일이라는 하나의 주파수에 맞추고 단순하고 쉽게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뿐이었다.
대리 시절 회사에서 너무나 잘 나가는 여자 선배가 있었다. 명문대 출신다운 명석한 두뇌에 비율 좋은 몸이 만들어 낸 멋진 스타일. 게다가 성격까지 털털해 인기도 많았다. 그녀는 천직이라고 믿는 자신의 일을 맘껏 사랑했다.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휴일도 반납하고 여름휴가 따위는 그녀의 계획표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일 앞에 우뚝 서 있는 그녀는 날마다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달라 보였던 건 어느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그날 밤, 나는 놓고 간 물건이 있어 잠시 회사에 들렀다. 모두가 회사를 떠난 어두컴컴한 사무실의 어디선가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부스럭 부스럭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불빛을 향해 조용조용 발걸음을 옮겼다. 검은색 후드 티에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쓴 누군가가 이어폰을 꽂은 채 노트북의 화면을 뚫려져라 보고 있었다. 순간 고개를 든 사람은 그녀였다. 불쑥 자신 앞에 나타난 나를 보며 그녀는 반가운 듯 환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왠지 쓸쓸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일이 없는 날은 하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는 날인 지도 몰랐다. 오늘 같은 크리스마스에도 말이다.
그녀는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해 노트북에 담아둔 영화나 한편 볼 생각으로 사무실에 나왔다고 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과 정장을 벗어던진 그녀의 몸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수줍고 겁 많은 소녀 같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습이 언젠가 내 모습 일지도 모른다는 연민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후배에게 들켜버렸다는 찜찜함을 그녀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고 무작정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졸랐다. 갑작스러운 나의 제안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씩씩하게 내 팔짱을 꼈다. 회사를 나온 우리는 이런 날 어디를 가도 붐비기 마련이니까 이왕이면 가고 싶은 데로 가기로 했다. 나는 이태원이라고 외쳤고 그녀는 손을 높이 들고 택시를 잡았다.
크리스마스 날의 이태원 거리는 예상보다 차분하고 한산했다. 나는 전에 가본 적인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고 은빛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린 문을 힘차게 밀었다. 레스토랑 안은 이미 꽉 차있었고 입구에 마련해 놓은 대기석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나는 웨이터에게 두 사람 자리가 있으면 어디든 앉겠다고 했지만 그는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적으라는 손짓을 하고 사라졌다. 레스토랑을 나와 한 시간가량을 헤맸지만 축복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날에 우리를 위해 남겨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찬바람에 얼굴은 빨개지고 잔뜩 움츠린 몸은 벌써 차가워졌다. 괜히 그녀를 끌고 와 이 고생을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돌아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맨 처음에 갔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지금 자리가 생겼으니 오라고 했다. 그리고 미리 음식을 주문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다고 했다.
나는 미트볼 스파게티와 샐러드 피자 그리고 특별히 시칠리아 산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다시 찾아간 레스토랑의 아담한 구석 자리에는 우리를 위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녀와 나는 반짝이는 촛불을 마주 보고 앉아 와인 잔을 들고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위해 건배를 했다. 그녀는 금세 와인 한잔을 비우고 내가 덜어준 미트볼을 안주삼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회에 나온 후 지금까지 보낸 크리스마스 중에서 오늘이 최고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회사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그래서 차라리 일이 많은 게 맘 편하고 좋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나를 끝없이 그들의 이벤트에 끌어들이는 몇몇의 절친들이 없었다면 나도 그녀처럼 일이 없는 날엔 혼자 방구석을 헤맬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의 빈 잔에 와인을 채워 주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일 없는 날이면 함께 미트볼 스파게티를 먹는 게 어떠냐고. 그 후로 오랫동안 그녀와 나의 크리스마스 메뉴가 된 미트볼 스파게티– 이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외국기업의 임원이 된 그녀와 함께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