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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울의 참을 수 없는 유혹

꼬막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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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서슬이 퍼런 칼바람이 부는 회사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날이면 퇴근길에 나를 픽업하러 오는 자상한 남편이나 기꺼이 나를 위해 기사 노릇을 해 줄 남자 친구가 나에게 아직도 없다는 사실이 슬쩍 서글퍼졌다. 괜스레 울적해진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기억 속 그들의 전화번호를 뒤적이다가 나도 모르게 겸연쩍은 웃음이 터졌다. 나의 이런 짠한 바람을 어떻게 알았는지 최근에 서촌으로 이사를 간 후배에게서 문자가 왔다.‘차가운 맥주 한잔과 삶은 꼬막이 있는 겨울밤은 어떠신지? 괜찮으면 퇴근길에 모시러 갈게요.’


우리는 뒷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듯한 차가운 바람에 떠밀리며, 일 년 내내 청사 초롱이 매달려 있는 서촌의 시장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리가 내린 가게 앞의 널찍한 평상 위에 던져놓은 그물망 속의 꼬막들을 흐뭇한 눈으로 힐끔 쳐다보고, 가게 안의 빨간색 플라스틱 테이블에 얼어붙은 몸을 밀어 넣고 삶은 꼬막과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한파가 몰아치는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게는 이미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우리는 마지막 남은 빈자리를 용케 차지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서 ‘스타의 맛집’이라고 소개된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빳빳하게 코팅이 된 주홍 색 마분지 위에 휘갈겨진 사인들이 메뉴 판을 밀어내고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온 단골 가게를 두리번거리며 맥주 한잔을 따르고 막 삶아낸 알이 굵은 꼬막을 기다렸다. 효자동 토박이인 또 다른 후배의 단골집이었던 이 조그마한 포장마차는 물이 오른 제철 해산물의 싱싱한 맛과 소박하지만 아늑한 분위기로 첫눈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기꺼이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출근 도장을 찍으며 단골 임을 자청했다.


무뚝뚝한 표정의 젊은 사장님이 다리품을 팔아 전국 각지에서 찾아낸 해산물들을, 주방의 이모님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세숫대야 같은 냄비에 넣고 휘휘 저어가며 잘 삶아, 손맛이 담긴 투박한 초고추장이나 달짝지근한 양념간장과 함께 내놓았다. 한 번도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말을 떠올릴 만큼 그 맛은 언제나 감동적이었다. 야들야들 적당히 살아 있는 쫀득쫀득 매혹적인 식감과 씹을수록 흥건하게 샘솟는 놀라운 감칠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검지 손가락 만한 당근과 함께 서비스로 나오는 찌그러진 냄비에 담긴 푸짐한 홍합탕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요리였다. 그 덕에 그냥 돌아가기 허전했던 퇴근길의 딱 한잔 만으로 시작한 술자리가 여지없이 질퍽한 과음으로 이어지곤 했다.


나는 하얀 김이 새어 나오는 꼬막 위에 달짝지근한 양념장을 톡톡 올리고, 윗니로 토실한 살덩이를 꽉 깨물어 비릿한 바다 내음이 나는 육즙까지 단숨에 빨아 먹였다. 그리고 입 안에 남은 기분 좋은 짠맛이 사라지기 전에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손님이 넘치면 단골인 우리를 위해 식재료를 쌓아 놓은 쪽 방에 자리를 만들어 주곤 했던 정 많은 사장님의 어머님도 젊은 사장님도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입구에서 대기자 명단을 부지런히 적고 있는 아르바이트 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한시 반이라는 제안된 시간을 통보했다. 순간, 우리의 포근했던 아지트가 줄어드는 숫자를 틈틈이 확인해야 하는 시간제 노래방처럼 불편해졌다. 우리는 꼬막 한 접시를 더 추가할까 망설이다 가게를 나왔다. 이 추위에 여기까지 온 것이 억울한 생각이 들어 근처의 다른 가게로 섭섭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아쉬움을 남긴 삶은 꼬막을 또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투덜 되기 시작했다.‘한겨울의 추위를 참아가며 찾아온 단골 포장마차의 꼬막 - 유명세를 타기 전에 된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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