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물 스튜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웠다. 나는 좀처럼 불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코맹맹이 소리 같은 쑥스러운 발음도 영어에 이상한 부호가 더해진 철자도 나는 왠지 싫었다. 불어 시간마다 딴짓을 하는 나에게 불어 선생님은 한껏 인상을 쓰며 주의를 주었고, 그때마다 선생님의 넓은 이마에 또렷이 새겨진 주름이 마치 빨래판 같았다. 그 후로 불어 선생님은 나로 인해 ‘빨래판’이라는 몹쓸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런 나와 달리 늘 같이 야간 자습을 하던 그녀는 불어를 몹시 사랑했다. 가끔 나에게 불어로 쓴 편지를 건네기도 하고 샹송에 푹 빠져 주말마다 레코드 가게를 돌아다니며 테이프를 사 모았다. 결국, 그녀는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27살의 어느 가을날 동창 모임에 결혼할 상대인 프랑스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때만 해도 국제결혼이 그리 흔치 않아 다소 충격이었지만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예식장을 사푼사푼 걸어 나오는 그녀는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갔고 몇 번의 이메일이 오가고 언젠가 파리로 놀러 오라는 엽서와 크리스마스 카드가 왔다. 그 후 그녀는 세월과 함께 기억 속에 희미해진 고교 동창으로 잊혀 갔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파리로 혼자 여행을 가겠다고 결심을 하고 서점에서 여행 책을 뒤적이다 문뜩 그녀 생각이 났다. 파리로 가는 김에 연락이 된다면 한 번쯤 그녀를 만나고 싶어 졌다. 오래 전의 메일을 뒤지고 뒤져 그녀의 메일 주소를 간신히 찾아냈고, 그동안의 안부와 나의 파리 여행 일정을 알리고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다. 출발 전 날 기적같이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아직도 파리에 살고 있는 그녀는 반가움의 인사와 더불어 그녀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겼다. 파리로 간 나는 예약한 호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간절한 요청으로 그녀의 집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그녀의 인형 같은 딸과 자상한 남편은 그동안의 그녀의 삶을 말해주었고 그들의 보금자리인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아파트는 한없이 로맨틱해 보였다. 오랜만에 조우한 옛 친구를 향한 반가움은 잠시, 나는 자꾸만 그녀가 틈틈이 쏟아내는 결혼 생활에 대한 넘치는 행복감에 나도 모르게 초라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녀가 부러웠고 그 덕에 외로워졌다. 얼른 그녀의 집을 나와 어차피 혼자 온 여행이니 고독이나 실컷 만끽하거나 혹시라도 그녀처럼 프랑스 남자를 운명같이 만나 눈부신 파리를 함께 배회하고 싶었다. 주말에 함께 프랑스 근교로 여행을 가자고 조르는 그녀를 만류하고 나는 이곳 파리에서 꼭 해야 할 거창한 계획이 있는 듯 씩씩하게 그녀의 집을 나와 호텔로 갔다.
예약한 호텔은 사진보다 낡았고 어둡고 추웠다. 히터를 최고로 틀어도 방안의 한기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샤워기의 물은 미끈거렸고 뜨거운 물은 그저 미 직지 근할 뿐이었다. 프런트로 내려 가 컴플레인을 해보지만 느글거리게 생긴 프랑스 청년은, 그저 호텔에 혼자 묵은 동양 여인을 묘한 눈빛으로 힐끗 대며 제대로 된 답도 속 시원한 해결도 해주지도 않았다. 나는 짜증이 있는 대로 났지만 스스로를 다독이며 추스렀다. 이런 사소한 것들로 망쳐서도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되는 게 바로 여행이니까.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12월 초의 파리는 영하의 기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슬의슬 추웠다. 두꺼운 코트를 챙겨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얇은 스웨터를 몇 개 씩이나 껴입고 호텔을 나섰다. 찬 바람을 피해 들어간 미술관은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거리를 걸으며 먹는 딱딱한 바게트는 씹을수록 감칠맛이 났고, 카페에서 마시는 따뜻한 카푸치노는 최고였다. 화려한 밤의 드레스로 막 갈아입는 파리는 지금부터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것처럼 내 손을 끌었다. 나는 꽁꽁 얼어붙은 몸을 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 파리에서 살다 온 후배가 알려 준 해산물 레스토랑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미 저녁 9시가 다 돼 가지만 아직도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일단 대기자 명단에 이름이라도 올려보기로 했다. 레스토랑 입구의 웨이터에게 혼자라고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웨이터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에 그는 나에게 혼자 식사하는 레이디가 있는데 당신과의 합석을 허락했으니 당신만 좋으면 지금 당장 식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얀 캐시미어 원피스 위에 연한 핑크 빛 퍼로 된 도톰한 솔을 두른 세련된 프랑스 할머니의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그녀의 매력적인 눈빛과 미소는 첫눈에 나를 압도했고 그녀의 빨간 입술은 자신의 앞자리에 수줍게 앉은 나에게‘환영한다, 어서 오렴’이라고 속삭였다. 어쩔 줄 몰라하며 메뉴 판을 뒤적이는 나에게 그녀는 말했다. “혼자 여행을 온 거야? 파리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또 말했다. “멋진데… 아주 멋져. 그럼 오늘은 너를 위해 최고로 맛있는 걸 주문하는 거야.”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 앞에 놓인 동글 넙적한 냄비에 눈이 갔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 그녀와 같은 오늘의 스페셜 해산물 스튜를 주문했다. 그러자 그녀는 “역시… 센스 있는 멋진 아가씨야.”하고 말하며 내 앞에 놓인 와인 잔에 그녀의 와인을 가득 따라주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건, 내 응원의 선물 이야. 가장 멋진 너의 파리 여행을 위해…”그리고 그녀의 와인 잔을 들어 나와 건배를 하고 웨이터를 불러 그녀의 음식값을 계산하고 자리를 떴다.
그녀가 사라진 빈자리에 주문한 해산물 스튜가 놓였다. 나는 그녀의 눈빛처럼 빛나는 까만 홍합을 손으로 집어 그녀처럼 우아하게 속살을 빼먹었다. 샹젤리제의 멋쟁이 할머니를 쏙 닮은 매력적인 해산물 스튜 - 언젠가 나도 그녀처럼 멋지게 나이 들기를 기도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