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쌀국수
새벽부터 으슬으슬 온몸에 한기가 들고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하게 아파왔다.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한 뼘 정도 열어놓은 침대 옆의 창문을 거칠게 닫았다. 이 증상은 분명 감기임에 틀림없었다. 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인 벌레와 먼지만큼 피하고 싶은 게 바로, 얄미운 감기다.
언제부터인가 떨어진 면역력 탓인지 감기가 들면 도무지 잘 낫지가 않았다. 초기 증상을 감지하자마자 병원에 가서 주사도 맞고 열심히 약을 먹어도, 실수로 붙어버린 껌딱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감기라는 녀석에 한번 걸리면, 아침에 곱게 한 화장 위로 눈물 콧물이 수시로 흘러내려 어느새 판다처럼 번져 있고, 중요한 회의시간에 터진 기침은 민망할 정도로 멈추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코끝이 술 취한 아저씨같이 발갛게 달아오르도록 코를 풀게 했다. 결국, 이 구질구질한 증상을 한 달을 넘게 달고 다니게 하며 충분히 나를 괴롭힌 후 때가 되면 승리의 브이를 그리고 사라졌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월차를 내고 동네 단골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벌써 감기의 시즌이 온 것인가? 이른 아침인데도 병원은 환자들로 넘쳤다. 한참을 기다려 진료를 끝내고 엉덩이가 얼얼한 주사를 맞고 약 기운 탓에 어질어질 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약국에서 줄줄이 사탕같이 둘둘 말린 한 뭉치의 약들을 받아 들고, 예상외로 살가운 차가운 인상의 약사님이 서비스로 건넨 비타민 음료 한병도 마셨다. 초가을의 파란 하늘에는 아직 여름이 흔적이 남은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멍하니 약봉지를 뒤적이다.‘식후 30분’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자 까칠한 입 속으로 무언가를 밀어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무엇을 먹을까? 뜨끈하고 이왕이면 기운을 낼 수 있는 든든한 거면 좋을 텐데…’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는 메뉴는 매운 쌀국수였다. 얼큰한 고기 국물에 비타민이 많은 숙주와 양파 그리고 고기까지 들어가 있으니 텅 빈 내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 30분 후에 투여될 약들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리라.
아직도 한낮에는 더운 기운이 남은 탓인지 늘 북적이던 쌀 국숫집은 점심시간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한산했다. 매운 쌀국수를 주문하고 덤으로 나온 한 접시의 생 숙주를 물끄러미 보다 손가락으로 숙주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잠시 후, 새빨간 국물을 찰랑찰랑 넘치도록 담은 뜨끈한 쌀국수가 내 앞에 놓였다. 쌀국수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의 열기에 희뿌옇게 서리가 낀 안경을 벗어 놓고, 그릇 채 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한 모금 삼켰다. 뜨겁고 매운 기운이 내 몸속으로 짜릿하게 퍼져 들며 내 몸과 정신을 간지럽혔다. 식욕은 바닥이었지만 나는 젓가락을 놓을 수 없었다. 감기 바이러스로 힘들어하는 내 몸을 위해 나는 씩씩하게 젓가락을 움직여야 했다. 이마에 맺히는 땀을 연신 닦아 내며 쌀국수를 거의 비워내자 젖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나른 해지며 한결 가벼워졌다. 이 고맙고 기특한 음식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나를 괴롭히는 얄미운 감기의 천적이 되어 준 매운 쌀국수 - 감쪽같이 감기를 물리쳐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