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 맥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쓱쓱 제멋대로 그려내는 고모가 마냥 신기한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들은 내 일러스트의 빅 팬들이다. 토요일 저녁 다같이 저녁을 먹고 리모컨을 장악한 할아버지가 저녁 뉴스에 채널을 고정하면, 조카들은 가방 속에 챙겨 온 스케치북을 꺼내 들고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고양이, 강아지 등과 같은 귀여운 동물들부터, 자신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그려달라고 나를 졸라댔다. 내가 대충대충 그린 밑 그림들에 색연필을 들고 열심히 색칠을 하는 조카들을 흐뭇하게 보다가, 나는 돌연 천사같은 귀여운 어린 양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너희 들만을 위한 컬러링 북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것도 한달도 아닌 이주 후에…
언제나 그랬듯이 일이라는 녀석들은 무슨 법칙처럼 한꺼번에 손을 잡고 예고없이 들이 닥치는 법이다. 정신없이 한주가 가고 이제 약속의 날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않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며칠 미뤄도 그만 이었지만, 조막만 한 두 손에 색연필을 움켜쥐고 고모의 컬러링 북을 기다리고 있을 조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새벽까지 작업을 강행했다.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할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한 풍선들에 매달려 하늘을 비행하는 꼬마를 완성하고, 나는 보람찬 기지개를 힘껏 펼치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마도 그날 꿈속에서 동그란 상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조카들의 뒷모습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커피 한 주전자로 때운 탓인지 한순간에 느껴지기 시작한 뱃속의 허기는, 깊은 잠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악몽이라도 꾼 듯 벌떡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시간은 아침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직전 인 오전과 오후의 한가운데로 향해 있었다. 찌뿌둥한 몸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샤워 라는 축복을 느긋하게 내리고 은은한 라벤더 섬유유연제향이 나는 깨끗한 옷을 꺼내 입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토닥토닥 말렸다. 잠시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울컥하고 찾아 든 허기와 샤워 후의 마른 갈증을 느낀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허기가 지지만 좀처럼 입맛이 돌지않는 아침에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것… 이것은 말하자면 나에게는 굿 모닝 비어다.
이 굿 모닝 비어는 쌓이는 과제 때문에 밤샘 작업이 많았던 도쿄 유학시절, 간신히 과제를 마무리 한 후 함께 작업하던 친구들과 편의점 앞에 나란히 앉아,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마시던 맥주 한 캔에서 시작되었다. 막 내린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셔야 할 것 같은 이 시간에, 밤새 아무도 알아주지않는 우리들만의 열정과 노력을 아낌없이 활활 불태우고,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와 그냥은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무거운 머리와 부담이 말끔히 사라진 텅 빈 마음을 위한 소박한 위로였다. 이런 날에 이런 기분으로 마시는 나의 굿 모닝 비어는 언제나 짜릿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뭉클한 행복이었다.
물기를 대충 털어낸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 어제를 반복하는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며 맥주 한 모금을 크게 들이켰다. 가슴 깊숙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청량감은, 카~하고 자연스레 흘러나온 즐거운 비명소리와 함께 나의 몸을 잠의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깨워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눈뜨자 마자 맥주에 손이 가냐고 그리고 그 맥주가 그렇게 술술 넘어 가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직접 마셔 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가 없으며 아주 조금은 삐딱한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능청스럽게 말하고 싶어진다. 맥주 라는 녀석을, 알콜을 몇 퍼센트 품었다는 이유로 해가 지면 마셔야 한다는 상식에 가까워진 그 룰부터 깨야 하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한번 해보면 은근슬쩍 신나고 재미있어진다.
밤새도록 열심히 자신의 일을 끝내고 적당한 늦잠 후에 시작된 굿 모닝에 마시는 차가운 맥주– 스스로를 마음껏 기특해 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