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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소복소복 쌓이다

새해 첫날의 떡국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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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사흘 앞두고 본부장님의 방에 소위 팀장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동그란 탁자를 둘러싸고 다닥다닥 모여 앉았다. 본부장님의 한해의 반성과 새해의 당부가 심야 라디오 방송처럼 잔잔하게 20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내려 깔고 손에 쥔 노트 위에 검정 플러스펜으로 동그라미와 네모를 반복해서 그렸다. 그러다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일을 당한 그분도, 일 년 내내 실적 부진으로 주눅 들어 지내던 그분도, 이보다 더 치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분도, 요리조리 뺀질거리기로 금메달감인 그분도…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본부장님과 수시로 아이 콘택트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얼추 한 시간이 지났고 드디어 본부장님 방의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우리는 각자의 팀으로 돌아갔다. 나는 팀원들의 퇴근을 다그쳤고 그들은‘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텅 비어 가는 사무실에 적막이 흘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이 내려앉은 창 밖을 내려다보며 다짐을 했다. 남은 내 인생을 위해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것. 그리고 그간의 세월이 억울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을 것. 책상을 말끔히 정리하고 한 해의 손때가 뭍은 책들을 자리 뒤 편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사무실을 나왔다. 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조금 걷기로 했다. 서른 중반을 넘기고 나서부터 이 연말의 거리가 왠지 쓸쓸하고 허망하게 느껴졌다. 새해가 와도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향초를 밝히고 향긋한 허브티를 끓이고 식탁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작년 가을에 갑갑한 마음에 회사동기들과 용하다는 점집으로 점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한복을 곱게 입은 그녀는 나의 사주를 빤히 보더니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언니는 그동안 일하고 잠자고… 그렇게만 쭉 살았네요.”그리고 불쑥 고개를 들며 내 얼굴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나는 그 순간 움찔하고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비밀을 그녀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의 우주는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덕에 깊은 연애 한번 못했고 가족들과 시간을 제대로 보내 본 적도 없었다. 나는 늘 일 때문에 피곤하고 짜증이 나있었고 지쳐있었다. 잠시 동안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가오는 새해가 고비가 될 거라고. 그리고 또 엄청난 기회가 될 거라고. 만약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내 인생은 평생 일 만하다 끝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평생 일 만하다 끝나는 인생…’


나는 그녀의 말처럼 일 년 동안 수차례의 힘겨운 고비를 겪었고 드디어 새로운 기회를 잡기로 굳게 결심했다. 아직 그 기회가 무엇인지는 뚜렷이 알 수는 없지만 나는‘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외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분명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해의 첫날, 나는 처음으로 나를 위해 소박한 떡국을 끓였다. 인스턴트 사골 국물에 엄마가 보내준 떡국 떡을 넣고 간단한 고명도 준비했다. 식탁 위에 예쁜 테이블보를 깔고 언젠가 귀한 손님이 오면 쓰려고 아껴둔 그릇을 꺼내 정성스럽게 떡국을 담았다. 새하얀 눈처럼 소복이 쌓인 새해 첫날의 떡국 –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내 인생을 기대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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