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스팸 구이
4년 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짧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나는 정신없이 면접을 보러 다녔다. 다행히 도처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는 선배들 덕분에 나는 원하던 회사에 별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쓰던 나의‘무전기 같은 핸드폰’ 속에 저장되었던 전화번호는 고스란히 사라졌고, 모아 둔 명함들을 뒤지고 며칠 밤 머리를 짜낸 후에야 가까스로 지인들과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다시 뭉친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무심코 대화 속에 내뱉은 이름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연거푸 마신 술기운 탓인지 갑자기 그 이름의 안부가 너무 궁금해졌다. 나보다 두 살이 어린 그 녀석은 그때 한참 유행하던 인터넷 채팅 방에서 서로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가끔씩 시간이 날 때 어울리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 녀석과 나는 말이 잘 통했고 언제나 가벼운 농담처럼 시작한 대화를 지루하지 않게 끝없이 이어가며 서로의 비슷한 점들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급히 떠나는 바람에 그 녀석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했다. 어딘가 남겨놓은 전화번호도 없고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 녀석에게 명함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가게 안의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소리를 무신경하게 들으며 맥주 한 모금을 삼키다 기억 속에 가물가물한 전화번호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가게 전화를 빌려 번호를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그렇게 그 녀석과 나는 다시 만났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나 우리는 같은 회사의 선후배가 되어 날마다 회의실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벌리고 있었다. 새로 생긴 회사에 합류한 우리는 매일 야근이 이어졌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늦은 퇴근길에 회사 동료들과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셨다. 우리는 한참 취기가 오르면 회사 근처였던 그 녀석 집으로 자주 몰려 갔다. 뚝딱뚝딱 순식간에 먹음직한 술안주를 잘도 만들었던 그 녀석의 마지막 요리는 해장에 좋다는 이유로 언제나 계란 프라이와 스팸 구이였다. 잘 구워서 기름진 스팸 위에 노른자를 터트려 먹으며 위를 보호한다는 그의 말에 -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게 먹었다.
어느덧 그 녀석은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나보다 더 씩씩하게 회사를 잘 다녔으며, 지금은 해외 지사로 나가 얼굴을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어쩌다 지인들과 집에서 술을 마시다 계란 프라이와 스팸 구이를 안주로 내놓으면 기억 저편에서 아득해진 그때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수많은 술 취한 밤들의 끝을 장식했던 그 녀석의 계란 스팸 구이 -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음식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