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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냐?

신입의 추억 설렁탕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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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연수기간 내내 나는 속이 쓰리고 아팠다. 무엇을 넘기면 위장이 뜨끔뜨끔 해지는 탓에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식판 위의 몇 숟가락 되지도 않는 밥을 겨우겨우 넘기고 맵고 짠 반찬과 국은 손도 못됐다. 하루 종일 허기를 느끼지 못할 만큼 일은 바빴고 일분일초가 살 떨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날마다 3평 남짓한 회의실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것… 그것이 신입사원인 우리 일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끝임 없이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려야 하는 이 회의실에서의 공포가, 나의 온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나의 오장육부를 더욱더 민감하게 만든지도 몰랐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렵고 자신이 없었다. 숙제 검사받듯이 선배들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짜낸 아이디어를 꺼내 놓고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나는 한없이 소심해졌다. 지금까지 대단한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열등생으로 살아본 적은 없었던 나에게 학교도 아닌 회사라는 곳에서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인정하는 순간이 매일 반복되었다. 정말로 영혼이라도 팔아서 회의실의 모두를 까무러치게 할 만한 아이디어를 얻고 싶었다.


오늘도 반쯤 정신 나간 얼굴을 하고 오전을 보냈다.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간 시간에 나는 텅 빈 휴게실에 앉아 뜨거운 녹차를 마셨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도 먹을 수도 없었고 그저 한숨만 나왔다. 그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리고 기획 본부의 이사님이 들어오셨다. 이사님은 맥없이 앉아있는 나를 힐끔 보고는 “점심은?”하고 물으셨다. 머쓱해진 나는‘생각이 별로 없어서…’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이사님은 나를 빤히 보다 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일어나, 밥 먹자.”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라 간 나는 이사님과 함께 간판도 없는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곳은 이사님이 신입시절부터 줄곳 다니던 단골집이라고 했다. 이사님은 설렁탕 두 그릇을 주문하고 한 그릇은 나를 위해 특별히 살코기를 많이 넣은 특으로 해달라고 했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이사님 앞에 수저를 놓다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설렁탕을 잘 못 먹는다. 아니 아주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고기 중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고기는 국물에 빠진 고기이며 국중에 내가 입에도 되지 않은 국은 사골뼈를 고운 국이다. 내가 싫어하는 두 가지의 완벽한 결합체가 바로 설렁탕이었다. 이 험난한 난국을 어떻게 넘겨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순간 이사님은 나를 보며 “신입 때는 밥도 잘 안 넘어 가지? 소화도 안되고… 그래도 부지런히 챙겨 먹어야 싸울 힘도 버틸 깡도 생기는 거야.”하고 웃었다.


나와 대학 동문인 이사님은 소리 없이 후배들을 잘 챙기는 걸로 유명했다. 어쩌면 오늘도 휴게실에서 축 쳐져 있는 불쌍한 어린 후배를 위해 중요한 점심 약속을 미루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무조건 억지로라도 이사님의 응원과 애정이 담긴 설렁탕을 맛있게 비워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누릿한 고기 냄새가 났고 점점 강렬해지더니 내 앞에서 멈췄다. 뽀얀 국물 한가운데 수북한 고기가 고봉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크게 숨을 내쉬고 이 누릿한 고기 냄새를 진정시키기 위해 잘게 썬 대파를 두 숟가락이나 퍼 넣었다. 그리고 후춧가루 통을 사정없이 흔들어 뽀얀 고기 국물을 꺼뭇꺼뭇하게 더럽히고 고춧가루로 순식간에 빨간 얼룩을 만들었다. 숨을 잠시 멈추고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나의 다양한 극약처방 탓에 내 입 속으로 들어간 고기 국물은 그저 매콤한 파 국 물이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참고 먹을 만했다. 나는 이사님을 따라 밥을 반 공기나 말고 익은 깍두기를 올려 먹었다. 그런 나를 이사님은 “복스럽게 잘 먹는 거 보니 일도 잘하겠다.”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수줍게 미소를 짓고 그 말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또 한 숟가락을 씩씩하게 떠먹었다.


이상하게도 내 속은 따끔대거나 아프지 않았다. 나에게는 특별한 한 끼가 되었던 신입 시절의 추억 설렁탕 - 늘 우리를 보면 ‘밥은 먹고 다니냐?’하고 밥부터 챙기시던 이사님의 마음에 감사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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